내 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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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오
  • 권기복 <홍주중학교 교감·칼럼위원>
  • 승인 2015.03.3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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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을 맞이하고 있다. 겨우내 언 땅이 녹자마자 온갖 새싹들이 불쑥불쑥 솟아나오고 있다. 아마 봄은 새싹들의 뜨거운 입김으로 데워지는 계절인지도 모르겠다. 사오십년 전의 한반도는 참 가난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너나없이 먹을 것이 태부족하였다. 지난 가을에 알량하게 남긴 곡식은 바닥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어렵사리 분배받은 찐 고구마 조각을 솜사탕 뜯어먹듯 아껴먹다가 남몰래 자신만의 비밀 장소에 감춰두곤 했다. 그것조차도 다른 아이들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온종일 잃어버린 한을 곱씹으며, 안녕하지 못한 하루를 보내야만 하였다.

누나나 여동생들은 호미 또는 칼을 들고 들로 나갔다. 아직은 이른 냉이와 쑥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주로 개울로 가서 돌덩이 밑의 가재와 개구리 채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난겨울 초부터 들춰댄 개울인 만큼 가재나 개구리가 잘 잡힐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배고픈 아이들은 눈망울을 굴리며, 행운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지독한 가난을 누구 탓으로 여기지 않았다. 국민들을 보살필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과 부를 축적하는 위정자들이거나 농사를 짓는 족족 절반 이상을 지대로 빼앗아가고, 장리 이자로 남은 것의 대부분을 거둬가는 천석꾼, 만석꾼의 횡포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당시 장리 이자는 1년에 쌀 한 가마를 빌리면, 이듬해에 한 가마 반을 갚아야 하는 고금리였다. 심지어는 봄에 한 가마를 빌리고, 그 해 가을에 한 가마 반을 갚기도 하였다.

그 때만 하여도 가난은 그저 대물림되는 것이요, 내가 못나서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오늘날은 변해도 엄청 변했다. 아직도 사각지대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일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초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고 있다. 각종 재난과 재해에 대해서도 정부의 보상이 주어지고 있다. 일자리도 풍부해져서 근로를 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와 의지만 갖고 있다면, 기초생활을 위한 벌이는 어렵지 않다. 필자가 누차 거론한 바 있지만, 요즘의 한국사회는 단군 이래 최대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 반세기 이전의 한국 상황이 우리 한반도의 역사 내내 살아온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 본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오늘은 우리 조상들이 꿈도 꿔보지 못했을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회는 나날이 ‘분노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고 한다.

그 양상을 보면, 가히 천차만별이다.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개인적 일상생활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개인적인 분노가 중층적으로 쌓이고 있다. 또한 사회적 측면에서 갑을문화, 정부 불신, 재벌 횡포 및 탈세, 유전무죄 무전유죄식 법 집행, 전관예우 및 낙하산 인사, 논문 표절과 도덕성을 상실한 선량들,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인터넷 댓글과 SNS, 미성년자나 장애인 성폭력에 대한 분노 등이 들끓고 있다. 이는 초고속 사회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정의롭지 못하게 가진 자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분노를 갖게 되고, 분노가 쌓여 증오로 증폭되어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에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청렴한 사회로 나아갈 절대 절명의 시기임을 깨달아야 하고, 모든 국민들이 남의 탓만을 하기 이전에 ‘내 탓’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또한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옭아매는 법제 확대보다는 도덕성의 강화로 포용과 배려의 심성을 함양하는 넉넉한 우리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분노는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필자는 영원히 분노가 소멸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오늘날의 상황은 거대한 사회 구조적 질병으로 확대되고,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꾸만 ‘남의 탓’으로 모든 상황에 대한 시각이 고착되어 간다는 것이다. 예전의 ‘내 탓’은 미련한 탓일지 몰라도, 앞으로의 ‘내 탓’은 다함께 상생할 수 있는 현명한 탓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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