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노래
상태바
계절의 노래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5.04.03 1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에 가보면 넘실대는 푸른 물결 저 멀리로 무작정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거기 부둣가 대리석 바닥에 그려진 세계지도의 경개(梗槪)를 보지 않더라도 사람을 망망대해 저편으로 불러내는 어떤 마력을 지녔다고나 할까? 바로 그런 자연환경이 콜럼버스로 하여금 겁도 없이 후추와 향료를 찾아 머나먼 미지의 나라 인도를 찾아 나서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곧 4월이다.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닐지라도 병상에 누운 분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이며 문을 온통 다 활짝 열어젖히고 봄의 향기, 대지의 용틀임을 한껏 껴안고 받아드리고 싶은 계절이 온 것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오오 찬란하다 5월이여” 라고 눈부신 5월을 찬탄하였는가 하면, 헤르만 헤세는 풍요로운 녹색 잔치가 시들기 시작하는 계절이 박두한 것을 아쉬워한 나머지 ‘9월’ 이라는 시의 첫 연을 이렇게 열었다. “뜰이 서러워하고 있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는 타성에 젖어 별 느낌 없이 그날그날을 죽여가는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지난 3월 초, 마트에 가서 햇쑥을 발견하고 반가운 나머지 멸치 넣고 된장국에 끓여 먹으며 행복해했던 일, 도다리 넣은 쑥국도 아닌 그것만으로 이 봄을 제대로 맛보고 즐기고 있달 수는 없다. 뭔가 비상한 각오로 동화속의 용감한 소년으로 돌아가보는거다. 어깨위에 얹혀진 세월의 무게를 털어내 버리고 어쨌든 담대하게 살아볼 일이다.

오는 4월에는 백월산, 용봉산은 아니더라도 엎어지면 코 닿을 남산에라도 자주 올라가 흙냄새, 바람결을 느껴 보리라. 달래, 냉이, 꽃다지, 두릅, 머위 나물이 시련을 이겨나가는 모습도 살펴보고, 나무와 풀, 자연속의 그들이 이웃 간에 어떻게 서로들 양보를 하고 협력을 이끌어내 조화를 이루어 가는지 배워볼 참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요즈음 한·중·일 삼국간에 돌아가는 제반 형세를 지켜보건대, 인간들의 독선, 탐욕, 아집, 어리석음은 끝모를 정도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어떤 이는 근래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국제정세가 구한말 때와 다를 게 없다고 장탄식을 했다. 이 개명한 시대에 그 정도까지야 되겠는가마는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처지다보니 오히려 그 때 보다는 더 고약한 지경에 처해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비극적 상황이니 일본의 역사왜곡과 우경화를 비롯한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AIIB(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 유치원 문제, 탈북자들 문제 등 총체적 난국이고 보니 온 국민이 머리 싸매고 중환자실로 달려가야 되는게 아닐까 염려 될 정도이다. 이 난국을 헤쳐 나갈 해답은 자연이다. 일단 하던 일을 뒤로 미루고 집밖으로 나서볼 일이다. 대자연 속에서 편안히 숨을 쉬면서 어려운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차분히 생각하고 풀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오는 4월에는 뭔가 가슴을 가라앉히고 축 처진 기분을 끌어올릴 수단을 찾아야겠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
이름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중학교 2학년 음악시간에 배운 박목월 시인의 ‘4월의 노래.’ 머릿속으로 멜로디만 따라가도 가슴은 뜨거운 설렘으로 방망이질 쳐대고 건강하게 살아있음에 목이 멜 지경이다. 아무튼 지금은 어쩌면 모두에게, 강력 무비한 삶에의 추동력이 필요할 때이다. ‘희망’을 안겨줄 대상이 있어야 하리라. 많은 이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서 ‘희망’의 표상을 발견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인 아닌 죄인의 몸으로 백의종군하시던 장군께서 구국일념의 ‘희망’이 없었던들 어찌 12척의 배로 적의 수많은 함선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셨을 것인가? 장쾌하고도 콧등이 절로 시큰거리는 쾌거다.

필자는 또한, 실패한 인생 끝자락에서 용기백배하여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돈키호테」를 써낸 세르반테스의 삶은 보며 ‘희망’의 위력을 실감한다. 스페인 중부 ‘만차,주(州)’의 들판 위에 풍차들이 서있는 그 언덕에서 저 멀리 내려다보이던 들판 그 위에 펼쳐진 노오란 해바라기 꽃들과 프르스름 하면서도 회색빛이 도는 올리브 나무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정경보다도 필자를 더 감동시킨 것은 기사소설을 읽다가 과대망상증에 빠져버린 알론조 키하라, 즉 라 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를 통해서 세르반테스가 가르친 불굴의 정신, 악을 징치하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그 투철한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말했듯이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굳건한 믿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고자하면 죽을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다”는 충무공의 위대한 가르침과 소설 「돈키호테」를 꿰뚫고 흐르는 정의 구현을 위한 불굴의 자세가 아닌가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