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에로스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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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에로스는 가능한가?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5.04.27 15: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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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이 지난 4월 초 전국 4년제 대학 전임교수 785명에게 ‘지금, 대학교수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소회를 물어 보았더니 80.2%가 “사회적 위상이 낮아지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설문조사에 답한 교수들은 “대학은 직업인 양성소로 가고 있고, 교수는 지식인이 아닌 지식기사”, “교수가 아니라 학생모집을 위한 마케터나 대학이라는 산업체의 일꾼으로서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대학과 지식인의 사명을 포기하면서 위상이 추락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반응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교수들은 학생 수 감소로 촉발된 대학구조조정에서 이유를 찾기도 한다. 올해 고등학교 졸업자가 63만 명인데 비해 2023년에는 39만 명으로 급감하는 상황에서 대학도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경우 자연스럽게 축소되거나 폐교될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인구 분포에 따른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대학 입학정원을 늘려주거나 새롭게 대학을 인가해준 교육부의 ‘눈 멈(blindness)’은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교육부는 대학구조조정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단순히 대학입학정원을 줄이려 하고 있고, 대학들은 이 칼끝 앞에서 학과를 통폐합하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높은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대학들은 유사학과를 통폐합하고, 취업이 잘 안 되는 학과를 폐과시켜 소위 잘나가는 학과들로 대학을 꾸려가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어려운 상황에서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값싼 행동일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비인기 학과들은 대학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고 다양한 학문의 생태계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 결과 전국 지역대학들은 비슷한 학과들로 구성될 것이고 폐과 대상이 된 교수들은 대학의 잉여인간으로 전락하며 생존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대학은 경쟁력을 갖춘다는 명분아래 타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교수를 평가하고 굴욕적인 분위기도 만들어 낼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수도 평가 받고 있고, 그 결과 훌륭한 교수는 여러 측면에서 좋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요즘 대학들의 추세다. 그러나 평가라는 것은 피평가자가 평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타당성이 높을 때 그 정당성이 담보된다.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훌륭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행위라고 거칠게 정의해 본다면, 한 인간을 역사 속의 존재로 자리매김 해 주는 일이라고 해도 그렇게 거창한 말은 아닐 것이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나에게 홍성역이 어디냐고 물어보았는데 내가 단지 그곳을 일러주었다고 해서 내가 교육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누군가가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단순히 남에게 전수해 주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교육자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사랑(에로스)에 대해 돌아가면서 의견을 말하는 대목이 있다. 당시 최고의 희곡작가로 꼽혔던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을 반쪽인간이 다른 반쪽인간을 애타게 찾는 마음이라고 생물학적 정의를 내린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아리스토파네스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부정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속한 신체부위라도 병들어 썩으면 잘라내듯 자기의 반쪽에서도 좋지 않은 것과는 합치려 들지 않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영혼은 아름답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그 갈망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하면 인간이 생물학적 에로스 이외의 방식, 즉 정신적 에로스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확대하고 타인을 통해 그 결실을 맺으려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처럼 실천하는 방법이 교육이라고 말한다. 선생의 정신적 에로스를 통해 학생은 아름답고 훌륭한 말, 행동, 생각, 기술 등을 배워 역사속의 존재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밀도 높게 만나는 일이다. 그러기에 교육을 통한 만남은 서로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탐구하고 전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 해야 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학교 교육에서 이와 같은 교육행위는 어렵지만, 그 정신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대학구조개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교수가 교육자의 위상을 잃어가며,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지식기사의 역할에 그친다면 그 사회는 불행을 약속하고 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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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정 2015-05-23 11:05:49
실천하는 방법이 교육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선생의 정신적 에로스를 통해서 역사속의 존재로 성장하는 것이다.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밀도 높게 만나는 일이다.
참 귀한 글 감사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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