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새 옷을 갈아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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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새 옷을 갈아입다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5.06.1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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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영화들이 요즘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재개봉되고 있다. 리마스터링을 거친다는 것은 화면의 선명도나 음질, 색상 등이 더욱 좋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 영화를 보았을 때 스크린에 비가 내리는 듯한 현상은 이제 추억 속에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새 단장한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롤리타(1997)’도 5월 28일 우리나라에서 처음 재개봉 된다.

 

이 영화는 러시아 출신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가 영화화된 것이다. 이 소설은 우선 야할 것이라는 선입감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며 나보코프의 개인적 삶도 그와는 거리가 멀다. 나보코프는 볼세비키 혁명으로 러시아를 떠나 유럽을 전전하다가 미국에서 ‘롤리타’라는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된다. 조국을 떠나왔지만 스스로 러시아 문학의 대부격인 푸시킨의 뒤를 잇는 러시아 적통(嫡統)의 작가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롤리타’를 써서 대박을 터트리자 찬사대신 비난이 쏟아졌고, 강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된다. 그 당시 유명한 문학 비평가였던 윌슨은 이 소설을 두고 “현실감이 없고”, “끔찍스럽거나 비극적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재미있기에는 기분이 안 좋다”라는 평을 했다. 이러한 반응은 이 소설을 서둘러 읽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느낌일 것이다. 어느 비평가는 자신이 “이제까지 읽어본 소설 중에 가장 역겨운 소설”이라는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이렇게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 현대영미소설의 훌륭한 정전으로 인정받았고, ‘롤리타’를 포함한 나보코프의 다른 작품들도 ‘박사학위를 받기위한 텃밭’이 되었다. 그 이유는 작품의 다양한 문학성에서 찾을 수 있다.

‘롤리타’의 줄거리는 요즘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일 것이다. 의붓아버지와 딸이 애정행각을 벌인다는 표면적 내용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든 남자가 어린 소녀를 탐하는 현상을 ‘롤리타 신드롬’이니 ‘롤리타 콤플렉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설이 발표되었을 당시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의 표면적 줄거리만 받아들이게 되고 야한 소설이라고 입소문을 내어 그 덕분에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롤리타’의 인세(印稅)로 스위스의 호반 도시 몽퇴르에 있는 근사한 호텔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소설을 읽고 비난을 하게 되자, ‘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라는 후기를 책 뒤에 붙이게 된다. 이것은 마술사가 자신의 마술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보코프는 소설을 쓸 때 독자와 한판의 체스게임을 하듯 여기저기 많은 트릭들을 숨겨 놓았는데 그것을 알려준 셈이다. 퍼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독자들의 비난에 답답한 나머지 후기를 붙였지만 이것은 나보코프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나보코프가 이 말(‘롤리타’는 연애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영어로 쓰인 소설이라는 것)을 해두지 않았더라면 작가의 트릭이 밝혀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비난은 여전히 계속되었을런지 모른다.

영화의 남자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두번 반복되는 우스꽝스런 이름)는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오면서 샬로트라는 여인의 집에 하숙을 하게 되는데 그녀의 딸 롤리타에게 반하여 하숙을 결정하게 되고 결국 결혼도 하게 된다. 샬로트가 죽게 되자 험버트 험버트는 의붓딸 롤리타와 미국의 전국을 떠돌며 애정행각을 벌이게 된다. 롤리타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그녀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결국 롤리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롤리타를 유괴했었던 퀼티를 험버트 험버트는 총으로 쏘아 죽인다. 피묻은 얼굴로 시골길을 운전하는 험버트 험버트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애드리안 라인의 영화 ‘롤리타’는 나보코프의 언어유희, 독자와 한판 게임을 하는 듯한 트릭 등을 놓친 채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의 관계만을 따라간다. 그러나 1962년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흑백영화 ‘롤리타’는 오히려 나보코프의 문학성을 살려내고 있다. 누군가가 이 소설을 영화로 다시 만든다면 저자의 문학적 마술을 영화 속에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영화가 원작소설보다 더 나은 경우도 많으니까. 주말에 선명한 영화를 보시고, 찬찬히 소설도 읽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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