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유감(讀書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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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유감(讀書有感)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5.11.23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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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설레는 마음 다독이며 보고 싶은 연인을 만나러 가듯, 읽고 싶었던 책을 찾아 책방으로, 도서관으로 찾아 나서기 딱 좋은 계절이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운치 있는 수필집을 펴낸 임어당(林語堂)은 청나라 초기의 문사 장조(張潮)가 지은 ‘유몽영(幽夢影)’을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 보다도 뛰어난 격언·수신서로 평한 바 있다. ‘유몽영’ 첫 머리에 “경서(經書) 읽기에는 겨울이 좋고, 사서(史書) 읽기는 여름이요,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는 가을에, 문집류(文集類)는 봄에 읽는 게 좋다”고 쓰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유가(儒家)의 경전인 사서오경 따위는 정신 집중이 잘 되는 겨울철에, 중국 최초의 역사책인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한 반고의 ‘한서(漢書)’,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같은 역사서는 여름철에(여럿이서 쟁론을 펼쳐가며) 읽어볼 것이요, 노자의 ‘도덕경’, 장주(莊周)의 ‘장자’, 한비의 ‘한비자’, 강태공, 손빈 손무, 오기 등이 지은 병서(兵書) 등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학자들의 저서는 가을에, 유명한 정치가나 문사들의 시집, 서간문, 각종 저술 등은 봄철에 읽는 것이 어떠냐는 얘기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웬만한 지식 정보 나부랭이는 인터넷만 뒤지면 다 알 수 있는 오늘날, 한가하게 책이나 뒤적이고 있으란 말인가? 그렇다면,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삶을 좀 더 격조 있게, 한결 더 향기롭게 살고 싶은가? 아니, 이것도 가슴에 닿지 않는다면, 좀 더 창의적으로 살고 싶은가?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남에게 신세 지며 사는 삶에서 벗어나 남을 기꺼이 도우며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라. 가슴에 품은 꿈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열심히 좋은 책을 많이 읽기를 권한다. 젊은이들에게 가끔, 책 좀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곤 한다. 그럴 때마다 잠시 망설여진다. 왜냐면 무작정 “고전을 읽어라” 라고만 말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요즘 젊은이들은 책을 안 읽고, 책 읽기를 두려워하고, 책 읽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무심결에 내 기준에 따라 책을 추천했다가는 오히려 독서를 멀리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년도 더 된 얘기다. 한 번은 대학 1학년에게 (혹자에 따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더불어 영문학의 3대 비극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허만 멜빌의 ‘모비 딕(백경)’을 소개했는데 해당 학생은 결국 그 괴상하고 골치 패는 책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 하고 말았다. 차라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나, 읽기 쉽고 재미있는 한국문학의 걸작들을, 혹은 걸작 동화나 걸작 만화책들을 소개해줄 것을 그랬다고 자책하곤 했다. 책을 만나는 것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환경이 독서의 경향을 결정짓고 그 사람의 앞날의 행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초등학교 3학년 봄철 어느 날, 형들이 학교에서 빌린 춘원 이광수의 ‘흙’을 집에 놓고 가는 바람에 나는 책벌레가 되고 말았다. 소설의 주인공 허숭이 윤참판댁 손녀 윤정선과 살여울 냇가 소들이 풀을 뜯는 곁에서 첫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막혔다. 바로 위의 형이 역시 집에 놓고 간 학원문고 36번 ‘복면의 기사(원제는 월터 스코트의 아이반호)’를 읽었을 때나, 3권으로 된 ‘삼국지’따위를 읽었을 때도 언제 어머니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실지 조바심치며, 오줌 마려운 것도 참아가며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3일 동안 열병을 앓듯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어나갔던 그 황홀감도 내 생의 보기 드문 열락의 순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고, 이러한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리라 전망된다. 국가의 확실한 경쟁력은 젊은이들을 양질의 독서 속으로 이끌어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는 길이다. 그것만이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우리를 이끌어줄 황금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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