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고 넓은 삶 속의 ‘르상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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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넓은 삶 속의 ‘르상티망’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5.11.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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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프랑스의 바타클랑 극장과, 축구경기장, 음식점, 그리고 말리의 바마코 호텔에서 테러가 일어나 수백 명이 죽고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테러가 발생하기 직전에도 베이루트 지역에서 40여명, 나이지리아에서도 49명이 자살 폭파범의 테러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번 테러와 인질극은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주의 이슬람 무장단체들과 지하드(jihad), 파리외곽에 살고 있는 일부 이슬람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들과 유사한 단체들의 공격은 예전에도 있어 왔고 앞으로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구의 보복도 반복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들은 알라는 위대하다며 성전(聖戰)을 외치면서 악랄한(barbarous), 타락한(depraved) 방법으로 살상을 반복하는 것일까?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철학자의 눈빛으로 바라본다면 테러와 같은 유형, 무형의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은 사유(思惟)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녀는  아이히만(Eichmann, 유대인 대학살의 전범(戰犯))같은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최상의 악을 저지를 수 있음을 찾아냈다.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평범한 사람이 일을 처리해 나가게 된다면 그 결과는 최상의 악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도 나치가 시키는 대로 수백 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사유하는 삶이란 자신과의 소리 없는 대화이다. 그와는 반대로 혼돈과 공허해진 삶 속에서 자기만족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사유하는 삶과 거리가 먼 자들이다.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허술하니 나쁜 짓을 해도 악한 행동을 했는지 인지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이성을 회복하여 사물과 인간에 대한 공통된 감각, 즉 상식(Common Sense)이 있을 때 이 세상의 평화공존과 세계시민주의도 가능할 것이라고 아렌트는 ‘정신의 삶’에서 말하고 있다. 조직의 우두머리가 시키는 대로 테러 같은 폭력을 가하는 자는 아이히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문명의 충돌’에서 크리스트교와 이슬람은 지난 1400여 년 동안 폭력으로 얼룩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두 문명의 갈등을 진단했다. 두 공동체는 경쟁관계도 있었지만 영토, 패권, 정신을 놓고 십자군 원정이 발생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 이들의 갈등은 두 종교의 본질과 이들 종교에 바탕을 문명의 성격에서 나왔다. 종교와 정치를 통합하고 초월하는 삶의 방식으로서 이슬람교의 가치관과, 세속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분리하는 서구 크리스트교의 가치관은 대립해 왔다고 헌팅턴은 바라본다. 그러나 두 교는 일신교로서 자기 외부의 신성(神性)을 좀처럼 수용하려 들지 않으며, 세계를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원적 구도로 파악한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크리스트교와 이슬람은 정복을 통하여 교세를 넓혀온 역사였기에 ‘십자군’과 ‘지하드(戰士)’는 평행선상에 놓여 있는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가난한 이슬람교도들은 유럽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이번에 프랑스 대학살을 연출한 사람들 중에는 이런 이민자의 2, 3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파리의 외곽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마약과 무기밀매에 손을 대고 IS의 손짓에 쉽게 따라 나섰다. 프랑스 출신 세계적인 석학 기 소르망(Guy Sorman)은 11월 13일 파리연쇄테러의 원인을 “허무주의에 빠진 이슬람 이민자 2∙3세들이 목표 의식이 없는 삶 속에서 극단주의에 빠져 저지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해결책으로 IS척결과 허무주의자들에 대한 서구의 포용을 주장하고 있다. 기 소르망의 주장처럼 유럽에 흘러 들어온 이슬람의 난민들, 그리고 그들의 2∙3세들을 서구가 포용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도 충분히 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헌팅턴의 주장처럼 이슬람 문명권의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들은 자신들의 수준 높은 문명이 서구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자기들의 문명이 지금 비록 쇠퇴하고 있지만 자기들의 문화는 세계에 전파 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서구문명에 대해 극심한 ‘르상티망(Ressentiment)’을 마음속 깊이 갖고 있는지 모른다. ‘르상티망’은 철학자 니체의 유명한 말로 약자의 질투와 패배자의 시기심 을 가리킨다. 승자를 마음속으로는 인정치 않는 원망(怨望)의 뜻도 담고 있다. 시기심이 한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르상티망도 한 인간, 국가의 허름한 모습을 내보여 준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정서와 유사한 것일까? 인간의 무의식에 깊이 깔려 있는 르상티망의 악마성이 제거되지 않을 때 갈등과 불신은 재생산 된다.

개인, 국가 간의 분노와 테러 그리고 살상을 하게 만드는 르상티망은 키메라(Chimera,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이한 짐승)이거나 바실리스크(basilisk, 쳐다보거나 입김을 부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뱀과 같이 생긴 전설상의 괴물)일 뿐이다. 마음속의 이러한  괴물이 사라질 때 자연스럽게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의 격은 높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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