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여름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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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여름나기
  • 권기복 <시인·홍주중 교사·칼럼위원>
  • 승인 2016.05.2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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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노천명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였다. 대자연의 만물이 융성하고, 활기 가득함을 자랑하는 푸른 오월이다. 4월의 신록보다, 10월의 단풍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5월의 풍성한 생명력에 있다.
이제 상춘(常春)의 지절인 5월 중순인데, 한여름의 날씨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뜨겁게 대지를 달구고 있다. 지구 한 쪽에서는 섭씨 52도까지 치솟아서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기도 하였다는 외신을 보았다. 우리나라도 예년에 비해 올해에는 여름이 한층 더 맹렬하고, 한 달이나 더 길게 갈 것이라 한다.
이런 현상을 그저 자연의 순리로 보기에는 너무나 갑작스런 변화에 의구심이 가득 들게 한다. 학계에서는 지구의 빙하주기가 10억 년인데, 우리는 현재 간빙기의 정점에 다가왔다고 한다. 또한 석탄, 석유,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지나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온실효과로 인한 이상 기후 징후가 지구촌 곳곳에서 보이는 것이라 한다. 아무튼 필자의 경험으로 봐도 예전보다 추위는 점점 누그러지고, 더위는 점차 맹렬해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더위를 어떻게 잘 이겨낼 것인지, 벌써부터 걱정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상 기후 변화에 대해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지구온난화가 가속화하면, 예년에 비해 더 큰 비바람이 몰아칠 수 있다면서 올 농사를 걱정하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는 ‘가난은 더위에는 살아도 추위에는 얼어 죽는다.’고 했지만, 이젠 정 반대로 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도 추위는 어떻게든지 버틸 수 있으나, 더위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겨울철의 난방비로 들어가는 전력량보다 여름철의 냉방비로 소모되는 전력량이 훨씬 많지 않은가.
지나친 더위는 사람을 지치고 무력하게 만든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온몸을 나른하게 하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저절로 피로감을 갖게 한다. 적도에 가까운 필리핀이나 태국, 캄보디아 등을 여행할 때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서 물씬 풍기던 나태함은 그 사람들의 본성이기 이전에 기후의 탓이 크다.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부지런하게 움직인다면, 오히려 온전히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그들의 나태하게 보이는 완만한 움직임은 더위와 함께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길고 긴 여름나기를 해야 하겠는가. 그동안 열 걸음 걷던 것을 아홉 걸음이나 여덟 걸음으로 줄여보면 어떨까? 한 두 걸음을 더디 걸으면서 삶에 여유를 갖는 자세를 가져보길 권한다. 우리는 대차게 굴러가는 산업사회를 살아왔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위하여 손과 발을 최대한 바삐 움직여야 했다.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새롭게 얻는 것에만 심취하였다. 그 결과 최대한 잘 먹고, 잘 입고, 안락함을 추구하는데 열중하였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많은 자가 행복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잘 먹기에 앞서 사람들은 억지로 굶으면서 살빼기에 급급하고, 입을 옷이 많을수록 진정 입을만한 옷이 없다고 투정부리는 것이 현실 아니 인가. 겨울에는 반바지를 입고, 여름에는 긴 외투를 걸치도록 냉난방을 틀어놓고, 마스크 쓰고 외출하는 현실 아니 인가. 소비가 과다해질수록 아끼는 것이 점점 없어지는 사회가 현재 우리들의 현실 사회가 아닌가. 지나친 물질만능은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를 우리들 뇌리에서 소멸시키고 있다.
올 여름은 자연과 순화하는 여름나기를 생각해 본다. 우리들이 가진 것을 최대한 내려놓고, 가장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느림의 철학을 즐기는 여름을 맞이하면 어떨까. 우리 조상들은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이나 깊은 샘물을 길어 세족(洗足)을 즐겼다고 한다. 찬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온몸이 시원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우리들도 시원한 그늘 밑에서 찬물을 담은 대야에 발을 담그고 독서도 하고, 명상도 즐기고, 친한 벗과 함께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어보면 어떨까. 지금 당장 하고자 하는 일을 열 가지 중 한 두 가지를 줄여서 여유를 갖는 것을 필수로 하는 여름나기를 즐겨봄 직 하다.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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