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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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말하되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6.09.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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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 했네” 한창 놀기 바쁜 어린 시절, 바쁜 일손을 거들고 밥상 앞에 앉을라치면 일꾼으로 온 옆집 아저씨가 벌쭉 웃으시며 던지는 말이다. 소년은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지면서도 수줍어 고개를 숙인다. 때마침 햇감자 넣고 얼큰하게 끓인 고등어찌개를 날라오던 건너편 집 아무개 어머니도 활짝 웃으며 “애썼다. 많이 먹어!”하시며 맞장구를 치신다. 소년은 가슴이 벅차오르며 마냥 행복했다.

어느덧 가을이다. 집 뒤 산자락에 벌겋게 번 밤도 다 쏟아져 다람쥐에게 다 뺏기기 전에 털어야지, 털 때를 놓쳐 저절로 쏟아지는 대추도 털어야지, 아차! 때를 놓치면 저절로 다 쏟아져버리는 참깨, 들깨도 털어야지. 배추밭 무밭도 가봐야 되고, 지붕위의 박이며 애호박, 늙은 호박, 비들비들 말라가는 넝쿨 사이로 죄지은 놈 마냥 숨어있는 오이도 따고 뇌랗게 익어버린 노각도 따야지? 가지며 고구마며 어서 거둬가라고 다 기다리고 있는데, 아뿔사! 고추는 또 어쩐다니? 이제는 다 익은 고추가 대추나무 연 걸리듯 즐비한데 그동안 틈틈이 따다 말려오던 태양초도 이 좋은 가을볕에 말려서 장날 내다가 팔아 아쉬운 대로 빚진 농자금도 상환해야 되는데..할 일이 지천이니 “감 따서 곶감 만들기는 당최 틀렸는가벼!” 농부는 울안에 있는 감나무를 올려다보며 한숨 섞인 혼잣말을 한다. 부모 사정도 모르고 도시로 나가 살림 차린 아들 딸네들은 참기름 들기름 보내라, 햅쌀 맛 좀 보자고 득달같이 전화질이다. 원 참내! 어디 그뿐이랴!

가난을 벗자고 금년 따라 남의 논까지 잔뜩 부치게 되었으니, 콤바인 두루르르 굴러 가는 논에도 가봐야지. 무논의 물을 빼야 트랙터가 들어올 것이니 논물도 빼야지. 농부는 건 짜증이 난다. “아니, 이 여편네가 그런디?” 요즘 따라 너무 바빠 입맛이 통 없는 농부는 아내가 날라온 점심밥상을 대하자 밥숟가락을 들다말고 고리눈을 하고 쏴붙인다. “햇콩 뒀다 뭐혀? 청국장 좀 하지!” “그럴 새가 있남! 애들이 햇곡밥 먹고잡다기에 방앗간 갔다 왔지, 깨 털어 기름집 다녀왔지, 고구마 캐랴 토란 캐랴 손이 열이라도 모자를 판이구먼!” 싸우는 건지 투정 부리는 중늙은이들이 밀당 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말싸움 하면서도 표정들은 어딘지 모르게 흐믓 하다.

그럴 것이 사방 천지에 땀 흘린 결실이 즐비하니 가을걷이하는 농부들의 풍성한 마음에 비할만한 것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이 농부는 아내가 곱게 흘기는 눈을 쳐다보다가 밥을 애들 주먹만하게 떠서 입 안 가득 밀어 넣고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우적우적 씹으며 파란 하늘을 쳐다본다. 그것으로 자신의 건 짜증에 대한 사과를 하는 셈이다. 지난날의 가을 풍경은 그랬다. 책상에 앉아 붓방아만 찧던 사내는 모든 게 팍팍해진 현실로 돌아와, 글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머릿속에는 “밥값은 하고 사느냐? 라는 자조적인 물음이 떠나질 않는다. 아파트를 벗어나 건너편 남산 만해 동산에 오르노라니 초가을 풀벌레 소리가 청량하다. 저런 미물들조차 태어난 의미를 열심히 되새기고 있는데, 공부한답시고 긴 세월 책만 붙잡고 살아온 나는 무엇을 하는 인생인가? 꽃다운 이름을 만세에 남기지는 못할망정 부끄러운 이름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우선 갈팡질팡하는 마음, 갑자기 대단한 업적이라도 성취해내려는 헛된 마음부터 다잡고 순리대로, 사람답게 사는 거다. 무심결에 뜯어서 입에 문 바라구풀잎이 내 지나온 삶을 지탄하는 듯 입안이 씁쓰레하다. 그래! 명경지수마냥 맑은 마음은 못될지언정 분수를 알고 욕심을 버리자! 명예욕, 물욕, 권세욕… 신세를 망치는 그 온갖 위험물질의 뇌관부터 제거하는거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곧추 세우려니 ‘시 삼백편 사무사’라는 공자님 말씀이 떠오른다. 시 읽기를 생활화하면 과연 헛된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인가? 음미하며 집으로 돌아오자니 만추를 노래한 황희 정승의 시조가 떠오른다. 대추볼 붉은 고을에 밤은 어미 듣뜨르며(떨어지며)/벼 벤 그루(턱)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술 익자 체 장사 지나(가)니 아니먹고 어이리.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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