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집회의 ‘가족 로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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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집회의 ‘가족 로망스’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6.12.12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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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하고 있다. 엄동설한 추위에도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대통령의 하야, 즉각 체포를 요구하고 있다. 청와대 100m 앞까지 몰려간 시민들은 화염병과 몽둥이가 아니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품격을 잃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추운 겨울밤 거리로 나선 것은 허접한 모습이면서도 제왕적 권력을 갖고 있었던 대통령, 패거리 지으면서 공천이나 얻으려고 눈치나 살폈던 국회의원들, 권력과 결탁하여 몇 푼의 뒷돈을 주고 많은 이권을 챙기려 했던 기업인들, 그럴듯한 자리를 얻으려고 정치권을 기웃대는 폴리페서들, 그리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고착화 된 기성세대들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우리 시대의 구태의연한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을 퇴출시키고, 인간답게 살아 보고 싶은 ‘누보 레짐nouveau regime’을 빌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뿐만 아니라, 갈수록 살기가 더 힘들어지는 헬 조선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가 서양의 역사 속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할 무렵, 루이 16세는 백성들의 지탄 대상이 되고 있었지만, 혁명당일 일기장에는 ‘사냥감을 잡지 못했다. 특별한 일 없음’이라고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 그는 왕으로서 정치 감각도 형편없었음을 보여준다.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트아네트는 국민들에게 성적 비하의 대상이 되어 그녀를 우롱하는 대자보들이 골목마다 나붙었다. 그 당시 왕은 말 그대로 절대 군주였지만, 무능한 지배층을 향한 시민들의 불만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린 헌트(UCLA 유럽사학교수)는 이러한 프랑스 대혁명을 ‘가족 로망스’라는 프로이드의 용어로 새롭게 조명했다.

가족 로망스라는 말은 ‘못사는 집 애들이 우리 진짜 부모는 사실은 명문귀족이고 지금의 부모는 가짜라는 환상을 품는 심리’라는 프로이드의 개념이다. 헌트는 프랑스혁명 과정을 나쁜 아버지였던 국왕을 부정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는 정치도 가정과 비슷하게 근본적으로는 가부장적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파악한다. 신하와 왕, 소작인과 지주, 아내와 남편, 아이들과 부모사이의 관계는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존경과 복종이라는 공통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단단하게 매어있었던 끈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끈에 묶여 신음했던 시민들은 이제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요구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과격성을 띤 것은 가부장적 권위에 근거한 사회적 질서를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적 합의와 계약 관계로 대체하려는데 있었다. ‘짐이 국가다’라는 루이 14세의 말처럼 국민들은 이제 왕을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장자크 루소도 국가는 계약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상을 피력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기초를 놓아주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지만 그 이후의 정치는 시민들의 희망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고 1814년까지 프랑스는 절대왕정→입헌군주정→공화정→공포정치→반동정부→군사쿠테타→제정→왕정복고라는 급격한 정치체제를 경험해야 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정치권처럼 그 당시 정치인들이 처한 정치공학적 셈법에 의해 정치를 저울질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부르짖는 많은 목소리들은 단순히 박근혜 대통령만의 퇴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의 삶을 옥죄어 매었던 단단한 사슬들, 즉 허접한 정치, 권력과 결탁한 일부 기업들, 복지부동하며 눈치만 살피는 일부 공무원들, 무한 경쟁으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경제시스템, 나만을 위하여 양심을 쉽게 팔아버리는 기성세대 등등의 퇴출을 위하여 촛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모든 혁명은 하나의 지배집단을 다른 지배집단으로 대치하려는 의식적 노력 이었다’라는 허버트 마르쿠제의 말이 의미 있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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