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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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대한 예의
  • 한학수 칼럼위원
  • 승인 2017.09.1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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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것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보이지 않는 대다수의 힘이다. 따라서 공정성(公正性)에 대한 국민 신뢰가 부족하면 사회 갈등을 격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즐기는 사회, 다시 말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회에서 국가의 책무는 국민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최근 국가 중대사 결정 과정에서 집권 세력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했다. 우여곡절 끝에 임시 배치된, 사드에 대한 정부의 대응 과정은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교육정책도 그렇다. 집권 세력이 구정부와 구별 짓고자 내건 새로운 교육정책은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을 무색케 했다. 사회적 공감대를 얻지 못한 데 있다. 이러다가는 교육체계도 흔들릴 수 있어 더 심각하다.

무릇 개혁에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조직적 반발이 예측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집행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면 그 정책은 사회에 유효적절하다. 따라서 새 정부의 개혁·적폐에 대한 해법은 현재의 국민적 지지를 대의제 민주주의 과정에 접목시킬 때 성공 가능성이 한층 더 높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5년의 권력을 위임하며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개개인의 삶이 더 낫게 바뀌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다수의 횡포’에 관한 우려를 제기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오히려 더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나와 다른 의견, 다수와 다른 소수 의견이 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올곧게 주장했다. 우리나라 헌법도 다수결이나 힘의 논리에 구애받지 말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라는 임무를 사법부에 맡기고 있다.

“여성의 패션과 화장에는 항상 두 가지 속성이 있다”고 한다. 손짓이기도 하고 방패이기도 하다. 사람 속마음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듯이 처한 입장에 따라 판단이 사뭇 다르다. 민주주의라는 우산을 쓴 정당정치가 특히 그렇다. 막스 베버는, 정치란 악마적 힘과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집권당과 야당의 처지가 ‘입장 바꿔 봐’의 대표적 예다. 토론하고 소통하며 합리적인 민주주의를 구현하라고 국민은 다수당 체제에 주권을 위임했다. 정치가의 덕목은 국민이 맡겨준 과제를 해결하는 책임윤리에 있다는 것을 한 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당정치의 갈등은 역사 속에서 당파싸움 형태로 지속되면서 외세 침입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을 유발했다.

혹여나 현재의 남북관계도 역사 속의 결정과정을 밟지 않을까 우려되는 까닭이다. 평화는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다. 북한 6차 핵실험 이후, 동북아는 출구 없는 동굴로 들어가는 형국이다. 국제사회의 노력도 별반 효과가 없다. 하지만 적을 막다른 길로 밀어붙이면 상대편도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어 모두 다 큰 피해를 보게 된다. 한 발짝 물러서는 눈앞의 용서와 양보는 손해 보는 듯 고통을 수반하지만 차후에 소정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여하튼 정부가 현명하게 리드하고 여야가 초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안보·경제가 반석에 있어야 다른 꿈을 꿀 수 있다. 선심 공세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정책은 미봉책에 불과하고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21세기는 지식경영과 창조경영 시대다. 정부도 4차산업혁명을 체계적으로 대비하고 지휘하는 ‘컨트롤 타워’로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고 있지만 기대가 부풀다가도 앞날이 궁색할까 걱정이다. 수많은 시련 앞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서고 재건한 저력은 지구상에서 유태인 못지않다. 하지만 그 근성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한 이후, 오히려 약점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정신보다 ‘나 먼저’ 정신이 사회 전면에 만연하고 있다. 말 그대로 각자도생이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 적폐청산은 또 다른 적폐를 부를 수 있다. “다리가 무너졌다고 다리를 건설한 정권에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는 문장에 울림이 있는 이유다. 노자는 “백성 위에 있고자 하면 말(言)에서 스스로를 낮춰야 하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스스로 몸을 뒤에 둬야 한다”고 《도덕경》에서 ‘스스로 낮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노자에게 우리 국민은 대답할 의무가 있다.

한학수<청운대 방송영상학과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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