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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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나들이
  • 이원기 칼럼위원
  • 승인 2017.09.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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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초가을 날씨는 참으로 맑고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어딘가에 고스란히 간직해두고 싶을 정도이다. 풀숲을 지나노라면 초목들이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채여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키득키득 웃고 명랑하게 떠들어댄다. 오곡이 통통 소리를 내며 탐스럽게 익어가는 들판은 또 어떤가? 풍년이 분명하니 좋은 일 좀 하자며 곡식들이 수런수런 논의하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온다.

아니, 김 씨네 감나무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담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게 아녀? 틀림읎다니께! 암튼, 이 좋은 날씨에 무엇을 한들 흥겹지 않으며 보람되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쌍가마 속에도 근심이 있다고, 이 좋은 계절에도 세상 어딘가에는 남모를 시름에 젖어 사는 이들도 있을 터이고, 한참 놀고 싶은 나이에 계절이 바뀌는지 날씨가 어찌 돼 가는지를 외면한 채 불투명한 미래에 뭔가 희망을 심고자 온 정신을 쏟아 학업에 매달려야 하는 청소년들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이러한 조심스러운 마음을 잃지 않고자 하는 한 편, 졸업을 앞두고 위축되기 십상인 마음에 가슴을 열어 감성을 자극하고 창조적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극작’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린 끝에 지난 일요일 오전 11시에 예술의 전당 서예 박물관 앞에 모였다. 일정은, 한중수교 25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열리는 치바이스(제백석 1864?1957)전을 본 다음, 전통 깊은 ‘백년옥’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경복궁 내 고궁박물관과 경복궁의 초가을을 온 몸으로 느끼고 뒤이어, 인사동에 가보기로 했다. 사드 문제로 한중 관계가 여의치 못한 이즈음, 한중 수교를 기리는 자리에 치바이스 화백을 그 상징적인 인물로 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는 1955년(92세)에 ‘국제평화상’을 수상했고, 1963년에는 ‘세계 10대 거장(The 10 Cultural Giants of the world)’으로 선정된 바 있다. 혹자는 “서양은 피카소, 동양은 치바이스”라고 말했다.

그는 호남선 상담현 백석포(白石浦)근처에서 제 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날 때부터 워낙 허약해 어머니와 할머니가 절에 가서 이마에 멍이 들 정도로 기도를 드린 덕분에 건강을 찾았으나, 열심히 농사를 지으려 해도 그럴만한 체력이 못돼 아버지의 권유로 먼 친척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운다. 그러나 그 역시 힘에 부쳐 목장(木匠)일을 하면서 외할아버지의 서당에서 배운 공부를 바탕으로 열심히 시(詩), 그림 등을 꾸준히 익히고 화가로 점점 이름이 나자 넓은 중국을 5차례에 걸쳐 여행한다. 그것도 여행만을 위한 여행이 아니고 그림을 가르치기 위해 불려다니면서 여행을 겸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키우고 예술가에게 자기 철학과 예술관을 형성시키는데 독서와 여행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사람이 훌륭한 생각을 갖고 힘쓰면 좋은 일이 생기게 마련이듯 그의 생애도 고비마다 훌륭한 선생, 좋은 친구, 후원자, 고귀한 화집과 책 등을 만나면서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해갔다. 그의 아내가 직접 권해 18살짜리 둘째 아내를 두고, 68살에 막내를 낳게 된 재미있는 삶도 그의 인품이 그럴 만 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전람회를 권한 나로서는 우리 학생들이 지루해 하지나 않을까 염려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관람 후에 ‘백년옥’에서 소문난 두부 요리며 목을 축일 겸 맛을 본 동동주를 아주 맛나게 먹는 모습에는 값진 시간을 보냈다는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목각, 석각, 전각, 인물화, 산수화, 화조도, 여지, 오이, 호박, 곤충, 병아리, 게, 새우, 쥐, 청설모, 독수리, 개구리, 소나무, 잣나무, 버드나무 등등 그가 그린 다양한 소재들과 붓글씨, 각종 전각, 소목가구, 문방사우 등을 보면서 우리는 맑고 단순한 가운데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놀라운 솜씨와 더불어 순수하기 이를 데 없고, 성실하며 탈속하고, 유머러스하며 진지한 영혼의 유유자적하는 자세와 평화 추구 및 생명 존중의 큰 뜻을 읽게 된다.

마지막으로 들른 인사동은 예전의 인사동이 아니었다. 모든 게 지나치게 상업화돼 모종의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위대한 화가의 훌륭한 삶의 궤적과 품격이 있되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좋은 날씨 속에서 충분히 맛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원기<청운대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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