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 <11>
사)진로상담협회 김순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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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 <11>
사)진로상담협회 김순자 이사장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7.10.0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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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로상담협회 김순자 이사장
초교시절 만난 김지한 선생님을 평생 롤모델로 기억하는 김순자 이사장.

김순자 (사)진로상담협회 이사장은 초등학교 때 만난 선생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일찍부터 교사를 꿈꿨다. “광동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당시 담임인 김지한 선생님은 예쁘기도 했지만 인품도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 여선생님은 깔끔하고 세련된 외모만으로도 학생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광동초교는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 자리를 잡은 시골학교로 당시 전교생이 교복을 입었다. 그런데, 학급에 교복을 사 입을 수 없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혼자만 남루한 사복차림으로 등교하는 제자의 모습이 너무 딱하게 보였던 선생님은 어느 날 학생들에게 학교를 졸업한 언니가 있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졸업생이 입었던 교복이 한 벌 들어왔다. 하지만 너무 커서 선생님은 그 친구의 체격에 맞게 직접 줄였다. 그리고 가난해도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라며 격려하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그 친구에게 교복을 전해줬다.

“제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선생님에게 반하고 말았죠. 아울러 저의 꿈도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깨동무’ 즐겨보며 꿈 키워
김순자 이사장은 초교 5학년 때부터 육영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어깨동무’를 즐겨보며 꿈을 키웠다. 어깨동무는 대통령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들에게 꿈을 키워주기 위해 매달 발행하고 있었다. 다양한 분야의 교양과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해줄 뿐만 아니라 컬러풀하게 고품격 잡지로 나왔던 어깨동무는 전국의 어린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김 이사장은 교육과 과학분야에 대해 많은 지식을 다뤄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며 매달 잡지가 나올 때 쯤이면 읍내의 서점에 달려가서 구입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잡지 한 권 사보는 것도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그때 반장을 맡고 있었던 그녀는 급우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얘들아! 우리 한 사람당 20원씩 돈을 모아 어깨동무를 사보기로 하자. 급우 60명이 20원씩 내면 1200원으로 어깨동무를 한 권 구입할 수 있는데 한 달 동안 두 사람씩 매일 돌려가며 볼 수 있단다~”

그녀의 제안에 급우들은 찬성했다.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매달 어깨동무를 구입해 볼 수 있었다. 그때 담임인 권영국 선생님은 대견해 하시면서 아예 무료로 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육영수 여사에게 편지를 보내라고 했다. 어깨동무 발행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시골의 어려운 형편을 이야기해 보라는 제안이었다.

김순자 학생은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고, 선생님은 매달 20원씩 급우들이 돈을 모아 구입해보고 있다고 그대로 적어 보내라고 말했다. 결국 실행에 옮겼고, 솔직한 고백을 적은 사연에 감동을 받은 육 여사는 곧바로 답례를 보내왔다. 청와대에 편지를 보낸지 일주일 만에 소포가 날아온 것이다. 뜯어보니 어깨동무가 3권이나 들어있었다. 그것도 육 여사가 친필로 이름을 적고 사인한 편지와 함께 졸업할 때까지 매월 보내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제 3권의 어깨동무가 매달 오니까 뒷반과 앞반 친구들까지 나눠줘 더 많은 학생들이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저는 그 잡지를 보면서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계속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교사의 꿈을 계속 키워나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광천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진학을 반대하셨다.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 오빠와 남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며 딸에게 양보를 요구했다. 아들을 우선시하는 당시의 풍조를 당연히 여기며 그녀는 선생님이 못된다면 간호조무사가 되어 돈을 벌 생각도 해봤다.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에 가서 간호학원을 다닐까 고민하고 있는데 중3 담임 한기옥 선생님이 안타깝게 여기시고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줬어요.”
 

함께한 협회 강사들과 한자리에.


■주경야독으로 교사자격증 따
바로 같은 지역에 실업계 고교였던 광천상업고등학교(현 광천제일고)에 시험을 쳐서 1등을 하면 전 학년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간청해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입학시험을 치른 결과 그녀는 수석합격의 영광을 차지했다. 3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녔지만 그녀에게서 초교시절의 꿈은 점점 멀어지는 듯 했다.

“타자와 부기, 대차대조표 이런 것만 배워서 대학에 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고교시절부터 교회에서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하면서 선생님이 되기 위한 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 주일 교회에서 보조교사를 하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고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교육청에 근무하게 됐지만 어릴 때 꿈을 되살리기 위해 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주경야독을 했지만 교육청의 업무는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송통신대학은 출석수업을 해야 하는데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공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2년 4회의 출석수업을 해야만 했는데 과장님이 학교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저는 낮에 통신대 수업에 가고 밤에는 쌓인 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길게 가기는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교육청보다 공부하는데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찾았다. 1년간 일하면서 공부를 해 시험을 보고 합격한 곳이 중앙정보부(현재 국가정보원)였다. 그곳은 보수가 넉넉했고, 공부할 수 있도록 편의도 봐줬다. 1979년 2월, 드디어 그녀는 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교사자격증도 땄다. 교사의 꿈을 이룬 그녀는 고향에서 교편을 잡고 싶어 충남도교육청이 실시하는 임용고시에 응시했다. 합격증을 받자마자 그녀는 중앙정보부를 곧장 사직하고 벽지학교 교사를 지원했다. 당시 상사는 극구 만류했다.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을 박차고 나가 박봉의 교사로 선택한 길을 직장상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만류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그녀는 당진군에 ‘여우골’이라는 산골의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봉급이 중앙정보부보다 절반도 안 됐지만 가르치는 일이 너무 좋았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가서 리코더를 가르치기도 했고,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오르간을 연습하며 수업준비를 하기도 했죠. 시골학교 생활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 후 그녀는 홍성 금당초교를 거쳐 서울로 가서 교직을 계속 하던 중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서울 아이들은 똑똑했고, 부모들은 교육에 관심도 많았다. 하지만 그 만큼 학부모들은 고민도 많았다. 특히 많은 가정이 맞벌이를 하면서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 문제로 상담을 요청했다. 그때 그녀는 상담의 중요성을 깨닫고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


■40대에 상담심리학으로 새길 찾아
“40살에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교사를 평생 해야 할지, 상담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어요.”
교육대학원에서 상담학을 배우고 석사학위를 딴 후 그녀는 학교를 그만뒀다. 그때 그녀의 나이 43살, 교감은 만류했지만 그녀는 상담분야로 나가서 10년 내에 박사학위를 따고, 상담전문가가 되겠다고 사표를 제출했다. 곧바로 박사학위 공부를 하며 상담을 시작했다. 선생님을 천직으로 아는 그녀에게 교직경험을 살릴 수 있는 기회도 왔다. 박사과정 2년째에 마침 고향의 혜전대학에서 요청이 들어와 강의를 시작했다. 3년간 혜전대 강사를 지낸 후, 세종대와 건국대, 루터대에서 겸임교수를 7년간 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한영대학의 상담심리학과 전임교수로 임용이 됐다.

“서울한영대 교수 3년째에는 59명의 교수들 중 교수업적평가 1위를 했고, 4년째에는 상담심리학과 학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수보다 평생교육 차원에서 사람들에게 상담을 가르치고 싶었던 그녀는 10년 전 한국진로상담연구원을 창립했다. 그 후 지금까지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직접 가르치며 상담자격증을 줬다. 자신이 길러낸 상담가들을 중심으로 4년 전에는 사단법인 진로상담협회도 설립했다.

한국진로상담연구원은 한국상담학회와 한국상담심리학회, 한국가족상담협회와 한국청소년상담학회 인증기관으로 석·박사학위를 가진 80여명이 강사로 등록돼 있다. 사단법인 진로상담협회의 본부는 서울 성동구 뚝섬역 부근 한 고층빌딩에 자리잡고 있는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상담자격증 교육을 하는 한편, 건국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 대학원에 나가 대학생들을 위한 강의도 계속 한다.

그녀는 먼 훗날 가족과 같이 고향에 돌아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도시 아이들을 위해 ‘농촌유학’을 운영하거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한 ‘가족성장연구소’를 운영해보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지금 그녀의 남편도 공직에서 은퇴한 후 청소년상담사 자격을 취득했고, 오빠도 철도청을 정년퇴직하고 제 2의 인생을 위해 올해 상담학박사를 취득해 뜻을 같이 한다.

그녀는 광천제일고등학교에 어려운 학생 3명을 추천받아 학비 전액 장학금을 3년간 후원하기도 했고, 스승의 날 자원봉사로 강의를 부탁받고 내려가 특강을 하는 등 자신을 키워준 모교에 대한 사랑도 각별하다. 지난해에는 홍성교육청에서 학교상담자들을 위한 수퍼비전을 했으며, (사)충남충효인성교육원의 자문위원을 맡거나 강의로 봉사하며 고향을 위한 재능기부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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