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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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길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7.12.0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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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도 지나고 날씨는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데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만산홍엽이니, 없는 여유를 만들어서라도 길 떠나기 딱 좋은 요즈음이다.

가을걷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촌을 생각하면, 좋게 말해서 한량이요 심하게 말하자면 건달과 다를 바 없는 차림으로 어딘가로 떠난다는 게 면구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먼 길에서 바삐 돌아오는 이에게 그럴만한 사정이 있듯이 당일치기 여행일망정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 사람에게도 사정이야 없겠는가? 무슨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는 거요? 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점을 생각해 보시라. 수다쟁이, 빚쟁이, 욕쟁이는 빼고, 글쟁이, 환쟁이, 무슨 무슨 쟁이로 불리는 예술가들은 영감이 고갈되면 어딘가로 훌쩍 잘도 떠나지 않던가? 정치인들은 또 어떤가? 대선에 패하면 반드시 어디론가 떠나거나 숨어버리고, 총선에 참패해도 당 대표급들은 두 손으로 하늘도 안 가린 채 사라졌다가 슬며시 되돌아온다. 어디 그뿐이랴! 기업의 총수님들께서도 신년구상 어쩌구 하면서 툭하면 비행기로 왔다갔다들 하시는데 공부하기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인력시장을 찾아 막노동에, 편의점 알바며 카페 알바에, 국가근로에 도서관 알바 등으로 번 돈이며 부모님이 보내주신 용돈을 절약하여 주말을 이용해서 당일치기로 학술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을 이해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나는 3주일만에 또 다시 근거리 여행을 가보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여행사를 먹여 살리는 이들도 직장인들, 학생들 같은 장삼이사 개미군단들이다.

소설 ‘연금술사’로 잘 알려진 파울로 코엘류는 모든 소설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들로 ①두 사람의 사랑이야기 ②세 사람의 사랑이야기 ③권력투쟁 ④여행이야기를 꼽았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 공감되지 않는 게 없으나 ‘여행’을 인간의 매우 중요한 행위로 파악한 것은 탁월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산수가 인간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여행’ 또한 ‘독서’와 더불어 인재를 길러내는 최고의 방법이다.

우리 열다섯 명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일요일 오전 10시에 하루걸이 행길에 나섰다. 모든 여행이 행복할 수 없듯이, 출발이 유쾌하다고 돌아오는 길 역시 즐거운 것만은 아닌 게 여행의 신비요 예측불허의 측면이다. 이번 여행도 나로서는 깨달은 것 못지않게 부끄럽게 여겨지는 점이 없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맨 먼저 들른 곳이 다름 아닌 음식점이었던 것부터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구태여 찾은 식당은 전국 4대 천왕이니 3대 천왕이니 하는 짬뽕맛집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감사한 마음으로 짬뽕 주발을 받았다. 일단 짬뽕의 비주얼은 좋았다. 양도 푸짐했고 국물맛도 괜찮았으며 면발도 쫄깃했다. 물론 짬뽕 값이 7000원인 것은 요즘 유행어로 썩 좋은 가성비는 못되었다. 그리고… 암튼, 몇 십분을 기다렸다가 먹게 된 음식치고는 뭔가 할 얘기가 있을 듯한 느낌을 주는 식사였다. 전국적으로 꼽아주는 맛집이 되기까지는 분명코 무슨 감동적인 뒷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단 한번 떠밀리듯이 식사를 한 것으로 맛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위안을 삼은 것은 짬뽕을 먹고 빵을 사러 간 사이에 뜻밖의 만남을 가졌다. 아! ‘마리서사’라는 작고 예쁜 서점을 발견한 것이다. 마리서사 책방이라면 일제 강점기에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이 운영했던 서점 이름이 아닌가? 주지주의 시의 대가 김광균과 박인환이 함께 시 모임을 가졌던 김수영 등이 자주 모였던 서점이 다시 부활한 듯 그 도시의 조용한 골목길에 있다는 자체부터가 나를 마냥 감동시켰다. 갸름하고 친근한 인상의 미녀형 서점 주인의 취향을 반영하듯, 서가에 꽂힌 책들도 엄선된 것들뿐이었다. 학생들도 선생의 속내를 눈치 챘는지, ‘기형도 시집’, 고골의 소설 ‘외투’,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든다’, ‘걷기 예찬’ 같은 책을 샀고, 나 역시 가스통 바슐라르의 마지막 저서 ‘불의 시학의 단련들’을 샀다.

얻은 것도 못지않게 잃은 것도 있는 하루 긴 여행이었다. 길 속에서 또 다른 인생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득도의 길, 해탈의 길은 아닐지언정 이제는 불치의 병이 되어가는 ‘길 떠나기’를 멈출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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