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 <13>
부평5구역주택재개발정비사업 김상준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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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 <13>
부평5구역주택재개발정비사업 김상준 조합장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7.11.0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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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5구역주택재개발정비사업 김상준 조합장

인천에서 주말마다 고향에 달려오는 칠순 아들의 효심
 

김상준 부평5구역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장. 조합 청산절차가 끝나면 노후를 고향에서 보낼 계획이다.

인천 부평구 최대규모 공동주택 명품 아파트 완공 입주 완료시켜
초창기 비리로 얼룩진 재개발 조합 바로잡아 조합원 신뢰 회복
대우건설 입사… 풍림산업서 퇴직 평생 건설인으로 한길 걸어와
92세 어머니 평소 보살펴주는 간병사와 경로당에 식사 등 보답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38-166번지 일대 6만4109.6㎡(약 2만평)의 부지에 최고 33층, 1145세대, 임대아파트 236세대까지 포함해 전체 18개동 1381세대의 대규모 공동주택이 2014년 9월 완공됐다. 인천 부평구에서 최대 규모의 재개발사업으로서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는 홍성군 장곡면 출신의 김상준(75) 향우다.

■비리로 얼룩진 조합 바로잡은 구원투수
부평5구역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 김상준 조합장, 아파트가 완공되고 조합원들이 입주한지 벌써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그의 신분이다. 아직 청산절차가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조합이 설립된 것은 2003년으로 그 동안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더 일찍 마무리가 됐어야 할 사업이 10년 넘게 질질 끌어야 했던 것은 전 집행부의 만성적인 비리 때문이었다.

부평5구역은 재개발추진위원회 시절부터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결국 위원장이 낙마했다. 조합이 설립된 후에는 조합장들이 같은 전철을 밟고 감옥을 드나들었다. 마지막 구원투수로 조합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등판했던 이가 김상준 조합장이다.

지난달 21일 오전 주말을 맞아 장곡면 도산리, 장곡면게이트볼장에서 그를 만났다.
“앞서 조합장을 맡았던 분들이 다 징역 갔습니다. 조합 간부들도 다 감옥 갔습니다. 그러자 조합원들이 ‘당신이 조합장 해야 된다’고 하면서 저한테 권유했습니다. 대의원들과 이사회의 추천을 받아 조합장을 맡게 됐지요. 아내와 가족들은 내가 감옥에 갈까봐 처음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5년 전 조합장을 맡았습니다.”

그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하나의 정해진 코스처럼 돼 버린 감옥행을 피한 것만으로도 그는 성공한 조합장이 분명했다. 

“이제 부평5구역은 인천에서도 최고 좋은 지역이 됐습니다. 3년 전 다 완공돼 입주했습니다. 그 동안 고소고발사건 60여건이 해결되고 지금 민사 6건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소송들이지만 결코 감옥에 갈 일이 없다고 자신했다.

“남은 소송이 모두 민사인데다 형사사건은 없습니다. 징역갈 일이 없죠. 저는 조합장을 맡으면서 손녀 손자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할아버지가 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업자가 저를 바깥에서 만나려고 하면 거절했습니다. 반드시 CCTV가 설치된 사무실에서 만나 원칙대로 업무처리를 했습니다. 사리사욕을 철저히 경계하며 모든 유혹을 이겨냈죠.”

전임 조합장들의 잇단 비리로 지지부진하던 재개발사업이 탄력이 붙은 것은 김상준 조합장이 평생 건설회사에 근무하며 쌓았던 노하우도 한몫을 했다.

그는 대우건설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으나 나이 60세를 맞아 정년퇴직은 풍림산업에서 했다.
오랫동안 대기업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밥’을 먹었으니 전문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투명하게 운영함으로써 결국 최고의 명품 아파트를 만들어 조합원들의 기대해 부응할 수 있었다.

■장곡면 예비군 중대장 지내기도
“부평5구역은 부평구에서 제일 큰 규모의 공동주택단지입니다. 우리는 삼성물산을 택해 명품 아파트를 지었죠. 제가 세 번째 조합장인데 추진위원장부터 치면 4대 조합장이 되는 셈입니다. 조합장들의 비리로 말미암아 조합의 손실도 많았습니다. 제가 집행부에 처음부터 관여했더라면 청산하고 많이 남겨서 다만 1억원씩이라도 조합원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초창기 집행부가 건설사들과 야합해 턱없이 공사비를 부풀려 조합원들에게 큰 손실을 끼친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입주 후 3년이 지나는 동안 1억원씩 아파트 가격이 폭등해 조합원들의 밝아진 얼굴을 보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그가 가진 탁월한 리더십과 남다른 추진력은 젊은 시절 7년간 장곡면 예비군 중대장을 지내면서 쌓은 것이다. 군대에서 영관급 장교를 지낸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그는 단기 하사관으로 복무하고 중사로 제대했단다.

“군에서 제대한 후 7년간 고향에서 무보수 봉사를 했어요. 당시는 예비군중대장이 무보수였기 때문에 맡을 사람이 없었어요. 서울까지 쫓아와 저한테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향에 내려와 근무했습니다.”

예비군 중대장을 그만두고 그는 대우건설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건설공사 현장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통근하기가 매우 불편했다.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 부평공장을 건설하는데 일하면서 인천에 눌러앉게 됐습니다. 그때는 통금이 있어서 늦게 일이 끝나면 서울로 귀가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장 근처의 부평으로 이사하게 됐고, 그 후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대기업을 그만두고 나와서 사업을 한 적도 있었다.

“40대의 나이에 대우를 그만두고 하도급회사 홍익건설을 차렸어요. 대우와 삼일토건이 전주에서 아파트를 짓는데 참여했다가 같이 망했습니다.”
지방에서는 서울보다 교통이 불편해 인부들을 위한 숙식비가 덤으로 들었는데 실속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뛰어들었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1979년도에 5억원이면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부채를 떠안은 채 회사 문을 닫았다. 그때도 그는 고향의 저수지를 찾아와 낚시질을 하며 시름을 달래곤 했다. 나이 40대 초반의 가장에게는  중·고생 자녀들도 있었으므로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렇게 3년 동안 낚시질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풍림산업에서 그를 찾았다. 다행히 풍림산업에 특채가 되면서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다.

장곡면에서 만난 옛 친구들과 함께.

■조합청산 끝나면 귀향할 예정
그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요즘 매주 주말마다 내려와 고향집에서 2~3일간 지내다 올라간다. 현재 장곡면 도산리에 계시는 어머니 김을득(93) 씨를 돌봐드리는데 김 조합장은 소문난 효자로 알려져 있다.

“지금 어머니 홀로 계시니까 외롭습니다. 제가 시간만 나면 내려옵니다. 어머니는 매일 인천에서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제가 없는 동안 간병사 아주머니가 경로당에 모시고 나가거나 병원에도 다니는 등 잘해 주셔서 어머니는 매우 감사해 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저녁시간까지 같이 지낼 수 없으니까 제가 웬만하면 여기 내려 와서 2~3일간 어머니 곁에서 쉽니다.”

김 조합장은 자신이 함께 할 수 없는 날 어머니를 보살펴주는 간병사와 마을 경로당 어르신들에게 식사도 곧잘 대접하며 보답한다.

인천으로 모시고 가서 같이 지내는 방법도 있으나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신다고 했다. 김 조합장도 어머니가 남아서 지키고 있으니까 그나마 고향에 자주 올 수 있어서 큰 위안으로 삼는다. 그는 아예 귀향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소송이 모두 끝나고 2020년까지 조합을 청산하게 되면 고향에 내려와서 노후를 보낼 생각입니다. 어머니가 계시고 선산이 있기 때문에 장곡에 와서 지내려고 합니다. 객지에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나갔습니다. 이제 자녀들도 모두 시집 장가 다 보냈으니 조합 청산절차가 끝나면 돌아오겠습니다.”

김 조합장은 장곡초교와 광천중, 광천상고(현 광천제일고)를 나왔다. 그래서 12년간 학창을 같이한 친구들과 예비군 중대장으로서 7년간 함께 했던 청년들 상당수가 남아 있어서 고향은 언제 내려와도 포근한 곳이다.

다정한 벗들을 자주 만나 게이트볼이나 탁구를 치며 운동도 하고 우정을 나누며 노후를 보내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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