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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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 이원기 칼럼위원
  • 승인 2018.04.05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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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가안다.’ 미세먼지에 감기에 혼쭐이 났다가 주사 한 방 맞은 덕분에 몸이 가벼워지니 콧노래가 절로 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드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우리나라가 6.25 사변의 홍역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에 나온 유행가이다. 1950-60년대 초까지의 우리나라는 모든 면에서 힘들었다. 봄철이 되면 우선 양식이 떨어져 삼시세끼는커녕 두끼 먹기도 힘들어 나물 천지인 죽으로 연명하고 물배를 채우며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

그 어려운 시절에 집집마다 자식은 또 왜 그리 많이 낳았던지, 입 하나 덜 자고 머슴애들은 도회지 공장으로, 부자집 일꾼으로 보내고 딸들은 도시의 잘 사는 집 식모로, 버스 여차장으로, 공장의 공순이로 내보내야만 했고, 학교 갈 나이가 지났어도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소년, 소녀들이 수두룩했다. 잔인한 봄은 계속 되었다. 소록도에서 탈출한 나명(문둥병)환자들이 ‘한푼 줍쇼’하고 들이닥치면, 들에 나간 어른들 외에 홀로 남은 착한 이쁜이, 금순이가 깨진 바가지에 보리쌀을 들고 적선 한 번 하려다 눈썹이 없는 문둥병 환자를 보고 공포에 질려 숨이 멎는다.

비극은 연달아 온다더니, 문둥병 환자가 가고나면, 이번엔 팔이 잘려 의수에 갈고리 손을 달고 나선 상이 군인이 들어선다. 어떤 상이군인은 보리쌀을 주면 바가지를 후려치며 욕설을 퍼붓고 돌아선다. 거지들은 떼거리로 몰려다니기 일쑤이니 학교 못간 여자애들은 이래저래 서러웠다.

그나마 학교에 간 소년, 소녀들도 차비 아끼느라 십리, 이십리 걸어다니기가 예사였고, 통근열차 타느라고 새벽같이 일어나야 되고, 차안은 또 학구열 넘치는 부모님 덕분에 앉을 자리는커녕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었다. 그 복잡한 차안을 헤치며 돌아다니는 김밥 장사 아줌마들, 오리온 드롭프스 따위를 싸게 파는 아저씨들, 야담과 실화 같은 잡지를 사라고 외치는 청·장년들, 오징어 땅콩파는 아낙네들, 갱생회(홍익회)회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차안에서 짐짝처럼 이리저리 시달리다 역사에 내리면 또래의 험삼궂은 고아들이 구두닦기통을 들고 설쳐댄다.
암튼, 그 고난의 시절에도 ‘봄’은 어김없이 풀빛 희망과 가슴 설레는 그리움을 꿈꾸게 해주었다.

“몇 번 째 맞는 봄인지요?”
강의동 뒤편에 막 피어나기 시작한 매화를 보고있노라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 말에 숨이 턱 막힌다. 지난주까지는 꽃망울만 맺혔던 것 같았는데 ! 그러고보니 건물 앞 양켠에 버티고 서서 “여기도 좀 보시지요!”하며 백목련이 희끗희끗 반 쯤 핀 꽃봉우리를 흔들고 있다. 그러니까 매화처럼 너도 겉으론 화사하게 웃으면서 속으론 이렇게 말하는거겠지? “그 동안 뭘하면서 지냈냐고요.” “나 이런! 숨 돌릴 짬은 줘야할게 아닌가?” 속으론 그렇게 대꾸를 했지만 입맛이 쓰다. 계절이 바뀔 때만 반짝 정신차리는가 싶다가도 이내 이리 달리고 저리 쫓기며 허덕이다가 세월 다 보내기가 몇 번이던가! 이번 ‘봄’ 만은 좀 더 확실하게 움켜줘야겠다 작심하고 <소로의 일기>를 펼쳐본다. 자연 속에서 살며 인생을 배운 숲속의 철학자가 쓴 일기라면 뭔가 특별한게 있을 법도 하다. 때 맞춰 4월도 시작되었겠다 그가 보낸 4월 초는 어땠을지 궁금하다.

1940년(그의 나이 23세 때) 4월 8일...역사의 증언에 따르면 가장 긍정적인 삶이란 삶에서 물러나 삶과 절연하고 삶이 얼마나 비천한 것인가를 깨달아 삶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건 뭐랄까? 통 속에서 살며 만족해했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삶도 아니요, 노자나 장자의 무위자연 철학도 아니고, 도연명의 귀거래사 풍의 삶도 아니지만, 하버드 대학 출신이면서도 속세를 버리고 콩고드 주변의 숲속에서 산 소로의 삶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1941년 4월 20일 노동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생각은 위대하다. 오늘 나는 축사 바깥에 거름을 쌓아주고 75퍼센트를 벌었다. 그런대로 괜찮은 수입이다. (내 어린시절이 떠오르며  편안하게 다가온다. 문득 모두가 잘 사는 길을 외면한 채 제 자신과 저희들만 잘 살겠다는 권력지향적인 인간들이 꼭 읽어봐야 할 구절이다. 트럼프, 시진핑, 프틴, 아베 씨 잘들 지내십니까? 예? 어쨌든 봄날은 간다고요?) 소로의 생활일기를 읽고나니 머리가 맑아지고 생각이 또렷해진다. 이런저런 생각 다 걷어내고 길가의 풀 한포기 속에서 세상의 이치부터 조용히 음미해봐야겠다.

이원기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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