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말을 내가 누구한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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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말을 내가 누구한테 하나?
  • 취재=김옥선/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4.2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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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2>

참외 장사, 엿 장사, 못 헌 장사가 없어
큰 딸 핵교도 못 보냈어 그것이 원이여
자리나 잘 잡아놓구 나 좀 데려가라구


 

김현예 1924년생으로 서부면 수룡동에서 태어나 18살에 상황마을로 시집 와 보따리 장사를 하며 육남매를 키웠다.

룡고지서 시집왔지. 18살 먹어서. 우리 할아배와 내가 갑자생, 쥐띠여. 우리 어매가 사위 선을 보러 여기루 왔어. 아버지가 “어떻댜?” 그러니 어매가 “아이는 별스럽지 않드만서두 시어매가 하구 사는 게 깔끔해서 그냥 하기루 했다구.” 그런다네. 그러니 아버지가 “시어매가 데리고 사남?” 그러는겨. 나는 철 모르는 마음에 그런데로 시집 보낸다고 그랬어. 동짓달 시집 왔지. 눈이 얼매나 왔다구. 저녁에 드러눠서 잠도 안 잤어. 할아배가 나를 만지면 톡 쏘고 톡 쏘고 그랬어. 난중에 할배가 가끔 그 소리를 하대.

내 동기간이 여동상 하나, 남동상 두울, 오빠는 돌아가시구. 여동상이 지금 90이여. 결성 살어. 내가 전화하구 지가 전화허구 그라지. 내가 그려. “구십 다섯이나 먹었는데 안 죽고 뭔 지랄이래.” 그라믄 우리 동상이 그래. “언니, 그냥 사는데로 살아야지 워쩐댜?” 그래 내가 그랬지. “그려, 사는데로 함 살아보자.”

리 영감은 스무 살 먹어서 군대 갔어. 군인 가서 연락선 타고 오다가 배가 엎어져서 다 죽고서 우리 할아배 하나만 살았어. 다 죽었다고 했어. 한 달 만에 왔드라구. “아, 이게 우쩐 일이여.” 그러니 우리 영감이 그래. 넘들은 다 떠내려가고 배 엎어진 위에서 하루를 떠돌아 다녔댜. 혼저 물 속에서. 바람이 부니께 물가로 가더래. 가니 집이 보일 거 아녀. 집으로 가니까 웬 사람이이냐고 그러대. 그래서 이만저만하다고 하니까 밥 주고 재주고 그러더랴. 거기서 있다 왔어. 살아서. 명이 길어서 왔는지 우떡해서 왔는지 몰러.

내가 시집 오니까 암 것두 읎더라구. 영감은 어매, 아버지 두고서 자기가 장손이닝께 돈 번다고 맨날 객지로 돌아다녔어. 내 고생한 거 말할 것도 읎어. 장사란 장사는 다 해서 먹여 살렸어. 사탕 장사, 김 장사, 그릇 장사, 참외 장사, 엿 장사, 못 헌 장사  읎어. 그것들 머리에 이고 팔아서 거기서 곡식 주면 이고 와서 애들 하구 먹느라구, 갈 적에 한 고개, 올 적에 한 고개, 그라구 다녔어. 그 지랄하구 살았당께. 김 장사 할 땐데 할매가 “에구, 애기 엄마가 어떻게 이런 걸 갖구 다녀. 김 한 톳이 얼마유?” 그래. “쌀 서 되유.” 그랬지. 에고, 세상에나. 그 할매가 쌀로 서 되 주더라구. 내가 얼매나 기분이 좋아. 그거 이구 집에 와서 그거 찧어서 밥 해먹구 그랐지. 우리 큰 딸 열 살 먹었으까. 큰 딸은 핵교도 못 보냈어. 지 동상들하구 집 보라구. 내가 장사하느라. 그래서 지금까지 그것이 원이여. 그래두 지가 뇌가 좋아서 그러는지 다 국민핵교 깨쳐서 다 혀. 그만하기 다행이지. 우리 딸들이 그려. 아배는 혼자 돌아다니고 어매가 가르쳐서 고맙다고. 어매 장하다고 했어.
 

 딸 스무 살 먹어서 여웠네. 내가 큰 딸을 여워야 하는데 우리 할아배는 맨날 돌아다녀 싸니께 알간? 그래두 워떡혀? 그 때는 여워야지. 그렇게 다 해도 우리 할아배는 그걸 몰렀어. 딸하구 사위하고는 하루 저녁 자구서 갔는디 그런데 할아배가 울어? 내가 욕을 했어. 울기는 지럴이라구. 나는 눈물도 하나 않나. 울기는 지랄이라고 울어. 그러구서는 또 가드라구. 배 탄다구. 중선배를 13년을 탔어. 그렇게 돌아다니면서도 그라구 돌아다니다 아이 슬라믄 아 맹글어 놓구 가구 그래서 여섯 낳어. 그게 어쩐 일이여? 그래 애를 딸 넷, 아들 둘 낳지. 첫 애 아들 낳구 막내 아들 낳으니 들여다라도 볼 거 아녀? 우리 영감 막내 아들 낳았는디 들여다도 안 봐. 우리 시어매가 “에구, 우리 애기, 아배 왔다. 이것 좀 와서 봐라.” 하는디 그래도 쳐다도 안 봐. 그렇게 뚝뚝혀. 그러니 내 속상허지. 넘들은 잘 하고 호강하구 두 내외 사는디 난 그렇게 못 허니께.

다 같은 사람이라도 난 어찌 이러나 그랬지. 우리 육촌 동서가 나하고 이웃서 살았어. 우리 영감은 군인 가고 나는 혼자 살고 가난하고 그러니께 나보구 나가라는겨. “냄편도  읎고,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사니? 나가라.” 그러는겨. “아고, 성님, 으디로 나가? 왜 친정으로 가? 잘 살라고 시집 보냈는디 친정에 으떻게 가?” 그랬어. 그렇게 가라구 해도 안 나갔어. 나갈 줄을 몰러. 뭐하러 나가? 이 집에서 살아야지. 나가면 못 쓰는 줄 알고 나갈 줄을 몰러. 그래갔고 살았어.

가 저녁에 어떤 때는 영감 사진 보고 욕을 혀. “이 할아배요, 나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자리나 잘 잡아 놓구 나 데려가라고 하니 왜 안 데려가고 저 지랄하고 혼자 가서 있느냐구.” 그러구 욕을 허지. 가슴 아픈 말을 내 누구한테 하나? 그렇게라두 하지. 우리 할아배 86살에 돌아가셨어. 감기가 왔는데 오토바이 타고 보건소 가서 약 타다 먹고 그러더라구. 그래 내가 “보건소 가지 말구 병원을 가유.” 그랬더니 보건소 약이 더 잘 듣는다나. 나중엔 몸 달리니까 병원에 갔더니 폐렴이랴. 그래 폐렴으로 죽었어. 내가 잔을 부으며 그랐어. “나하고 한날한시 죽는다믄서 왜 먼저 가느냐구. 자리나 잘 잡아놓구 나 좀 데려가라구.” 근데 안 데려가대? 꿈에도 안 벼. 그리고 이렇게 살어. 스무 살 되아서 애 낳고 구십 다섯 먹구 안 죽구 무슨 지랄이여.

 

리 시동상하구 시누이도 내가 다 여웠어. 그 때도 영감은 안 왔어. 우리 시어매가 나한테는 아주 잘했어. 큰 집은 여기서 살고 난 저 너머서 살았어. 그렇게 나를 재금 내주더라구. 내가 뜨건 걸 잘 먹어. 내가 어린애를 업고 큰 집에 오믄 우리 동사들 보구 그랴. “네 성 온다. 불 좀 뜨뜻하게 때서 국 좀 뜨뜻하게 해서 네 성 줘라.” 그랬어. 그렇게 잘했어. 말하면 뭣혀. 시누 그것두 죽었네. 시어머니는 80살에 죽었어. 처음 시집 와서 시어머니가 길쌈을 나더러 허래. 내가 그런 걸 할 줄 알아야지. 시동상 바지저고리하고 버선을 내놓는디 아, 소매가 되덜 안혀. 이 씨부랄. 뜯어갔고 어떻게 해보니 되더라구. 그래도 예닐곱 돼서 그런 거 한다고 시어머니한테 찬송 받았어. 

래도 우리 영감이 돈 벌어서 논 사고 밭 사서 우리 자식들이 농사졌지. 갯바닥에서 굴 주서먹고 그러구 살았지. 지금은 우리 아들하구 손자하구 살어. 손자는 객지서 살다 왔어. 아들이랑 같이 농사 짓구 일 보구 그러구 다녀. 내가 어줍잖게 이렇게 생겼는데 나 데리고 사진 찍고 그러대? 난 놀러두 안 다녔어. 워떻게 놀러다녀. 내가 안 다녔어. 애들 가르치느라 정신 없었지. 그것들 핵교 가르치느라. 우리 며느리가 얼매나 착한지 몰라. 그래 동네서 일러. 착하다고. 너무나 고맙지.

내가 우리 아들더러 그랬어. “나 죽고나면 화장하지 마라.” “왜유?” “화장하면 난 뜨거서 못 산다.” “죽은 사람이 화장하면 뜨건지 워쩐지 안댜?” “죽어도 뜨건 건 알아. 허지 마. 너희 아버지 산소 한쪽 파구서 거기다 잡아쳐 넣라.” 그랬어. 이제 다 했어. 안 혀. 고만혀.

집에서 마을회관까지 유모차를 밀고 한 걸음 걷다가 쉬고, 또 한걸음 걷다가 쉽니다. 네 번을 쉬어 겨우 도착한 마을회관에는 마을할머니들이 서로를 도닥여주고 밥을 나눠 먹습니다. 밥을 해주는 젊은 사람들이 없는 농번기에는 허리 굽은 할머니들이 도드락도드락 일하며 한 끼 식사를 해결합니다. 옆 집 할머니가 기력이 없다고 하니 밥 먹어야 산다면 꾸역꾸역 챙겨주십니다. 오후 4시가 되면 다시 유모차를 밀고 네 번의 쉼 끝에 집에 도착합니다. 몸이 불편해도 자식들에게 신세질까 당신의 속옷은 꼭 손수 빠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어머니입니다. 당신은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강합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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