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되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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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고 말고요!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8.05.1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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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니,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너무나도 떨린 나머지 오른 손은 심장이 요동치는 왼쪽 가슴에, 왼손은 좌석의 팔걸이에 살며시 걸쳐놓은 채, 나는 숨을 고르며 차창 밖을 내다본다. 양양에서 출발한 이 열차가 함경남도 안변까지 간다고 했으니 동해북부 선 열차가 틀림없고, 방금 전에 고성의 해금강을 지나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헌데, 빈 좌석 하나 없는 열차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하다. 혹시 유령열차? 그럴 리가! 유령의 집, 유령버스, 유령선 얘기는 들었어도 유령열차 얘기는 들어본 적 조차 없다. 가만 있자! 십 수년 전에 유령열차에 관한 얘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이탈리아의 어느 괴짜 의사가 러시아의 소설가 고골의 무덤을 몰래 파헤치고서 고골의 두개골을 가져가는 바람에 그의 남은 육신을 실은 유령열차가 멕시코의 어느 지역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였다. 그러나 산뜻하고 쾌적하기 짝이 없는 이 열차의 승객들은 결코 유령일 리가 없다. 손을 꼭 잡은 채 연신 눈시울을 훔지고 있는 맞은 편 좌석의 노부부나 그들 반대편에 앉아서 아직도 설레는 마음으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젊은 남자들 또한 나처럼 사단칠정을 지닌 사람들이다.

원산의 명사십리가 지척이라니 놀랠 노자가 아닌가! 비행기 여승무원 마냥 목에 알록달록 예쁜 스카프를 맨 열차 여승무원의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저 정도의 미모라면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 분명하다. 이제 원산에서 우리나라 최북단 온성을 지나 ‘동방의 빛’ 이라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면 꿈에 그리던 유라시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를 지나고 영불해협을 건너 런던까지 쾌속질주 하리라. 이 장쾌한 기차여행을 위해서 미모와 세련된 매너로 구색을 갖춘 숙녀들을 열차승무원으로 뽑은 모양이다.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고 알려진 바이칼호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곁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기분이 흐뭇해질 것만 같은 인상 좋은 여승무원이 빵긋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일진이 좋다고 여기는 순간, 귀청이 찢어질 듯 기적소리가 울리며, 석탄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뿐인가? 느긋이 앉아있던 나는 어느새 서 있고, 열차 안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의 열기로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 자신은 고등학교 일학년이 되어 오늘 아침에 땅개 배낭을 둘러메고 동기들 셋과 함께 5일간 무전여행을 나선 중이었다. 증기기관 열차라서 급수를 하는지 홍성역에서 꽤 오래 정차하고 있었다.

홍성은 충남 서부의 고도요 중심지답게 역구내는 오가는 행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공고학생인지 상고학생인지 너댓명이 더위도 아랑곳 않고 플랫폼 저끝에서 커다란 야외전축을 틀어놓고 팝송을 따라서 부른다. 빅쉽! 저스트 라이커 빅쉽! 클리프 리처드의 노래가 끝나자, 비틀즈, 비지스, 닐 다이아몬드, 올리비아 뉴튼 존, 닐 세데카, 엘비스 프레슬리, 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연주 등등 팝의 전설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인사를 건넨다. 또 한켠에는 전축소리에 뒤질세라 통기타를 든 대학생들이 발라드 풍의 노래를 불러댔다. 그 온갖 여름 냄새와 소리들이 난장판으로 범벅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 하나 없다는게 이상했다. 그때는 모든게 친환경적이었고 모두가 여유로왔다.

나 역시 그들 틈바구니에 끼어 젊음을 함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들 중 통일꾼이 될 인재는 얼마나 될 것인지를 따져보고 있었다. 나의 혼은 도대체 몇 개인가? 그뿐이 아니다. 머릿 속 한켠에서는 유달산 배불뚝이 도사의 수제자였던 김 처사의 말을 되새기고 있는 중이다. 작년 12월 동짓날이었던가. 모처럼 연락이 닿아 만난 김 처사가 대뜸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지금이 인류최대의 위기입니다. 제 얘기 흘려들으시면 안돼요.” 지금 전 지구의 지성들이 하나가 되어 인류를 분열과 전쟁으로 이끄는 다섯 가지 장애물, 즉 인종, 국가, 성별, 종교, 이념의 벽을 깨부수고, 고도로 발달한 외계 지성체와 인류의 새로운 신이 될지도 모를 인공지능 사이에 끼이고 만 인류를 구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진정하시게, 김 선생! 정작 심각한 것은 우리 배달겨레야! 기필코 하나가 돼야만 하는데...어때? 언제 쯤 가능한가? 김 선생의 고견을 듣고 싶네.” 십 이삼년 전이었던가? 홍성·예산 일대에서 귀신이 나오는 집으로 꽤나 유명한 ‘ㅇㅇ가든’에 귀신이 144명이 살고있다는 말로 나를 바짝 흥분시킨 바 있던 그가 한민족의 통일 전망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만에야 굵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선배님! ‘단군자손이 하나되기’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해결책 찾기보다도 훨씬 복잡합니다.”
목련꽃 순으로 만든 신이 차를 들여다보는 그를 바라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건너편 산자락 밑에서인지 먼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원기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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