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산에서 보낸 12년 학창시절 인생 영양분
상태바
갈산에서 보낸 12년 학창시절 인생 영양분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7.14 09:1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출향인 인터뷰<8> 김영훈 NH농협 성환지점장

대처 나갈 형편 못돼 갈산초·갈산중·갈산고 진학
오두리에서 면소재지까지 십리 산길 12년간 걸어서 통학
부모님 농사 돕느라 공부는 뒷전… 고2때 열공모드로
장교로 임관, 제대후 농협 입사 광천에서 첫 직장생활


NH농협 김영훈(51) 성환지점장은 갈산면에서 12년간 학창시절 추억이 있다. 다시 말하면 갈산초교(60회), 갈산중(30회), 갈산고(8회)를 차례로 다니면서 12년을 보낸 것이다. 면단위 농촌에 불과한 고향에 초·중·고가 다 있었으니 객지에 일찍 나가 고생할 필요도 없고 유학비도 아낄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 면소재지에서 초·중·고 해결
그러나 시골사람들은 그런 장점에 매력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잘해야 중학교까지는 보내더라도 고교교육은 비교적 가까운 군청 소재지나 멀리 큰 도시에서 받기를 원한다. 더 나은 교육환경을 가진 도시 학교를 거쳐 명문대학에 들어가 출세하는 것이 부모뿐만 아니라 자녀로서도 한결같은 마음이다. 그러나 김영훈 지점장은 대처로 눈을 돌릴 수 없는 형편에서 초·중·고를 면소재지에서 다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큰 축복이었다. 당시 그는 가까운 홍성읍내조차 진출할 수 없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지만 먹고 살기 힘들었습니다. 학교에 도시락도 못 싸가는 형편이었죠. 저는 늘 배가 고파 산에 가서 먹거리를 채취해 먹었습니다. 읍내 학교에 다니고 싶어도 버스로 통학하기도 힘들었고, 방을 얻을 수 있는 형편도 못 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선택의 여지없이 갈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때 갈산중학교를 졸업하면 70%가 외지로 진학하고 나머지 30%가 갈산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갈산중 졸업생 중에는 홍성고, 홍주고로 많이 진학했습니다.” 그의 고향은 갈산면 오두리, 초·중·고교가 있는 갈산면 소재지까지는 4km의 거리였다. 그는 12년 동안 십리 산길을 매일 한 시간씩 걸어 다녔다.

“오두리가 먹고 살기 힘든 동네였습니다. 원래 바닷가였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현대건설에서 바다를 간척하기 전에는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아 팔아서 먹고 살았죠. 당시 조개 한 대야에 800원, 1000원씩 했죠.” 김 지점장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누나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 조개를 잡아 팔아서 수업료를 냈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고교시절부터는 돈 벌기가 더 어려워졌다.

“현대건설이 바다를 막아버렸기 때문이죠. 바다에서 먹거리를 채취하지 못 하게 되자 주민들의 소득은 줄어들었죠. 마을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기업이 국가의 지원을 받고 하는 일이라 감히 반대할 꿈도 못 꿨습니다. 결국 고향마을은 현대건설에서 서산A, B지구를 막으면서 육지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당시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을 누구도 반대하지 못한 채 오두리 주민들은 그 동안 부업으로서 짭짤했던 어업을 포기하고 오로지 농사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 학창시절 농사 돕느라 공부는 뒷전
당시 갈산고는 우수생들이 오는 학교가 아니었다. 김영훈 지점장도 지극히 평범한 학생으로 입학했다.

“대부분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죠.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읍내로 나갔으니 ‘저녁에 뭘 하면서 놀아야 할까?’ 그런 것을 고민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공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선생님들이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는 학교에서 많이 밀어줬습니다.” 김 지점장도 처음부터 학구파가 아니었다. 방과후 집에 오면 부모님이 하시는 농사일을 돕느라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농사일이 엄청 많아 자녀들이 도와야만 했습니다. 큰집에도 일거리가 있으면 큰어머니가 도와달라고 청하셨는데 주말도 없이 일했어요.” 모내기부터 담배농사까지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모른 채 할 수 없었고, 부모님들도 자녀가 학생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고교 2학년 때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이 고생하시는데 나는 농사보다는 대학에 가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때부터 도망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결국 3학년 마지막 학기에 본 학력고사에서 4년제 대학에 충분히 입학할 수 있는 점수를 얻은 그는 한남대학교 경제학과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1986년 3월 그는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자라면서 갇혀 지냈던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났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학비를 대기가 어려워 장학금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등록금이 56만 원 정도 됐던 것 같은데 입학한 첫 학기에 성적우수장학금으로 50만 원을 받고, 농협중앙회에서 50만 원의 장학금이 나왔습니다.” 김 지점장은 대전에서 자취를 했는데 농사일로부터 해방된 몸이 되었기에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뒤늦게 공부벌레가 된 그는 입학 초부터 줄곧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양친의 어깨를 가볍게 해드렸다. 대학에서 마지막 2년 동안은 ROTC장교후보생으로 공부와 군사교육을 병행한 그는 1990년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임관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군에 복무하는 동안 지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는 슬픔도 있었다. 1992년 2월말 제대를 한 그는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농협에 입사했다.

“1992년 제가 제대할 무렵은 경제성장률이 좋았기 때문에 원서를 30군데 넣으면 20군데 될 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골라서 농협을 선택했죠. 또 고향에서도 근무할 수 있도록 보내준다기에 지원하게 됐죠.” 1992년 8월 17일 그가 처음 발령받고 근무를 시작한 곳은 농협 광천지점이었다. 1년 전 아버지를 여읜 후 혼자 고향집을 지키고 계신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통근하고 싶었으나 당시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불가능했다.

“광천에서 오두리까지 버스가 없어 출퇴근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자취를 했습니다.” 이제 아버지를 대신해 그가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전역 후 6개월 만에 취업한 농협에서 그의 여동생들을 위해 학비 지원을 해줬다. 오빠 덕에 여동생 2명은 무난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 어머니와 함께 1년간 지내며 출퇴근
그는 광천에서 1999년 10월까지 7년간 근무하고 홍성을 떠나 서울 서대문 농협중앙회 본사에 입성했다. 그 사이 그는 4급 승진시험에도 합격했다. 농협중앙회에서는 회원지원부에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전국의 회원농협과 지소를 대상으로 경영진단을 맡았다. 2007년까지 본사의 요직에 근무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2008년 3급으로 승진해 청양군지부에 2년간 내려와 청양군출장소장으로 근무를 했다. 다시 2010년 본사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 핵심 요직에 배치됐다. 농협중앙회가 사업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구조개편기획부 교육지원담당을 맡아 비전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그 때가 그는 가장 보람 있었던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그 후 그는 2016년 2급으로 승진해 NH농협 홍성군지부로 발령을 받았다.

“2012년 사업구조 개편이 끝난 후 중앙회에는 자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홍성군지부에도 자리가 없어 3급에게 주어지는 농정지원단장을 맡았죠. 2016년 홍성에서 근무하며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관내 농·축협 조합장님들이 저를 예쁘게 봐주시고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 때 1년 동안 그는 오두리 고향집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홍성읍내까지 출퇴근했다고 한다.

“아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같이 사니까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작년에 천안으로 발령을 받고 떠날 때는 너무 섭섭해 하셨죠.” 어머니는 올해 77살로 여전히 오두리 고향집에 계신다. 평생 농사를 하시며 몸도 성치 않으신데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배 편히 쉴 줄도 모른다. 6남매가 어머니를 위해 오래 된 집을 다시 지어드리겠다고 했지만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며 반대하셨다고 한다. 김 지점장이 지금 근무하는 성환 지역은 배와 원예작물을 하는 농업인들이 많다. 또한 축산과 낙농으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각 품목별 조합이 성환읍에 점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서 NH농협 지역사령관 역할을 하는 김 지점장의 어깨도 무겁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사무소장이 앞장서야 직원들이 같이 움직입니다. 상사가 직원들에게 일거리를 자꾸 줘야 사업이 잘 되죠.” 그가 직원들에게 인정받는 리더로서 지금까지 거침없이 달려올 수 있었던 비결처럼 들렸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하윤 2018-07-17 13:34:33
멋지십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