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이 아니라 상거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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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 아니라 상거지였어”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7.2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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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9>
김원호 1937년생으로 홍성읍 월산리에서 태어났다.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삼남매를 키우고 아들이 운영하는 예산국수 공장을 뒷바라지했다.

기서 태어나 여기서 쭉 살았지. 낳기는 산고락에서 낳지. 인공 때 여기루 피난 내려왔지. 산고랑이어서 무서워서. 막 빨치산 찔러 죽인다고 해서 일루 내려왔지. 그 때가 열다섯 살이었지. 아버지는 네 살 먹어서 돌아가셔서 조실부모했어. 욱 남매딘 아래위로 다 죽고 나 혼자 남았어. 다 지 명이지.

우리 형님 장가 든 것도 못 봤어. 어렸응께. 기억도 안 나고. 우리 누나들은 자고 나면 읎어지구 읎어지구 그려. 내 말 좀 들어 봐. 지금 같으면 결혼한다구 할텐디 원채 읎이 사니까 알기 쉽게 민며느리로 데려간거지 뭐. “엄마, 누나 어디 갔어?” 그러믄 “어, 저기 마실 갔어.” 그러케만 알았지. 그 뒤로 언제 온지 몰르지. 잘 사는 사람은 근친도 가고 했지만 우린 원체 못 사니 자식 낳고 살다가 한참 뒤에나 왔지. 열두 살 좀 넘어서는 누나들 봤지. 산고락인디 우리 아버지가 산지기, 산을 지켜가며 살았어. 산을 일궈서 뜨쟁이 먹고 살고 거기 산 임자가 논도 너 마지기 있던 거 반타작을 해서 그거 도지 주고 먹고 살았지. 그걸 우리 아버지랑 형님이랑 짓다가 내가 여덟 살 땐가 아홉 살 먹었을 때 우리 형님 징용 끌려갔어. 작은 형님은 나보다 다섯 살 더 먹었는데 핵교도 못 다녔어. 1학년 댕기고 말았어. 난 핵교도 못 데니구. 내 동생도 못 데니구. 그렇게 어줍잖게 살았어. 어머니가 산 일궈서 작은 형님이랑 나도 쪼끄만 할 때부터 심부름 다니고 이렇게 해서 먹고 살았지. 월산 그 뒤 그 때 딱 우리 집 한 채 있었어. 그 원 산 임자는 논밭 다 팔아가지구 읎어. 요 윗집 저 어린이집 자리가 우리 집 자린데 팔아 먹구 일루 왔지.

리 막내아들이 예산국수를 하는디 군인 갔다 왔는데 벌이가 뭐 있어? 지가 예산 처가 집 가서 국수 뵈갔고 와서 이걸 했지. 그래서 예산국수야. 예산국수가 잘 되니까 홍성 사람들이 전부 예산국수 됐어. 그래 내가 “너 이거 니가 특허낸 거니까 개들 고발하면 걸려들어” 그러니께 “다들 벌어먹고 살아야지유. 그 사람들도 그 사람들대로 살고 난 나대로 살면 돼유. 다 각각 사는거쥬.” 그러대. 손님들이 예산국수 다 똑같은 줄 아는데 다 맛이 틀리거든. 끄라비에다가 얘가 사진을 붙여놨어. 전화번호랑. 이제 그 뒤로부터 알더라구. 여기서 국수공장 하다가 이게 적어 가지구서 장곡 가송리로 가서 크게 자동화로 엄청 크게 하지. 공장만 거기 있구. 여기서는 10년이 좀 됐을까? 여기서는 물국수만 혀. 거기 물국수 공장 또 지면 골치 아픈께 거기는 마른 국수만 하고. 칼날만 바꾸면 돼. 여기서는 6,70푸대 밖에 못허는디 거기 가서는 하루 200푸대씩 돌리니까. 엄청나. 가보믄. 거기는 완전 내려타고 거는 데까지 와. 그 자리서 걸고 걸고. 여기서는 창고까지 들고 갔는디. 난 같이 안 했지. 나야 그 전에 소 맥였지. 마흔두 마리까지 맥였어. 우리 작은 아들 아파트 사주느라고 팔았거든. 소 입금이 얼매나 올랐다고. 280만 원 팔았는데 지금은 6, 7백만 원 씩 나가는데.

물한 살에 군대 갔지. 6·25 지나서. 강원도 가서 고생허구 그 뒤로는 안 혔어. 거기서 일 년, 경기도 가서 일 년, 전라도 광주 가서 2년. 강원도 대성산으로 갔었는디 우리가 뗄라고 나무 하는 게 아니라 부대놈들이 그거 해서 팔아먹는겨. 죙일 나무 자르고 해야 혀. 순전히 작업만 했어. 군인이 아니라 상거지였어. 산에 가서 나무 헐러니께 이 옷이 다 떨어지지. 바늘로 계속 꿰매 입어도 너덜너덜했어. 겨울복 주고, 여름복 주고. 저녁에 빨어. 다 마르지는 않지. 아침에 그냥 입어. 겨울에는 안 마르지. 겨울에는 그냥 오래 입는거지. 그 때 이가 몸땡이에 들퍽들퍽하고 막사에 빈대가 잔뜩허구, 얘기할 거 읎어. 거지 생활 했다니께. 월급은 있었는디 그 때 150원. 돈 구경 못했어. 주간? 지들이 다 먹구 안 주지. 밥도 제대로 안 줘. 보초 서다가 죽은 사람도 있어. 배고파서. 옛날엔 무법천지여. 강원도 있을 적에 내가 돈 좀 갔고 갔었는디 “중대장님 나 할 말 있어유. 이 돈 좀 맡아주슈.” “너 소원 있네?” “이 부대 말고 워디 파견 좀 보내주슈.” “너 후문 근무해라.” 후문 근무허니까 못 하겠어. 도둑놈이 많아서. 고기나 쌀 같은게 모두 후문으로 빠져. 이걸 우리가 못 나가게 하면 우리만 보채거든. 그걸 못 보겠더라구. 선임 하사부터 다 바깥 살림 허니께. 부식 쓸 만한 거 우리는 먹지도 못허구. “그래 나 정문으로 보내주슈.” 그래 정문으로 가서 3교대를 하는디 얼매나 좋은지 몰러. 보급소 차량들이 우리 동기들이여. 보급소 차 타고 오거든. 서부 앤데 “야, 임마.”하며 건빵 던져줘. 지 맘대로니께. 고기 한 상자 던져 줘. 그러니 얼매나 좋겄어. 우리가 맘대로 거기서 끓여 먹었어. 그때만 해도 분대장 노릇했어. 상병 달고. 병장도 분대장 못 했어.

농사 많이 짓지. 이것두 내가 재배해서 먹는겨. 여름 배추지. 여기 뺑 돌아 논이랑 밭 그러니께 넘의 손 벌려서 허지. 모 심는 거 백만 원 줬어. 한 마지기 10만 원씩이랴. 돈도 읎어. 낼 놀러갈 거 쪼끔 남겨놓고. 나 오늘 바닷가 놀러간다고 했는디 온다고 해서 안 갔어.

밭이 1000평, 논은 2000평, 열 마지기 짓는디 내 논은 얼마 안 돼. 서 마지기는 내 조카네꺼, 저기 서 마지기는 우리 작은 아들꺼, 원 논은 두 마지기밖에 안 돼. 부족혀. 하나 못 팔아. 종업원 때문에. 하나 빼지 않고 돈 주고 사본 일 읎어. 우리 딸도 겁나게 불쌍혀. 종업원들 다 해 맥이느라구. 일해가면서. 종업원이 여덟인가 돼. 고추 심는데 난 아파서 못허구 있는디 우리 딸이 전화가 왔어. “아버지 내가 낼 고추 심어드리면 워뗘?” “와 심어주면 좋지. 준비가 안됐는디 워떡한뎌?” “애들 내가 전부 데리고 갈게.” 그래 왔어. 거기서 여덟이 들썩들썩헌께 지나는 사람들이 “어이, 고추보다 사람이 많네.” 그려. 고추 300포기. 금방 끝났지. 한쪽에서는 고추 고랑 만들고 한쪽에서는 심고 말뚝 박고 비니루 치고. 여덟이 쭉 헌께. 난 가만히 앉아서 이렇게 이렇게 시키기만 허구. 일 못혀. 때로는 사람도 얻어 따기두 허구 할매도 따구 나두 따구. 

물여섯 살에 결혼했고 군인 가서 늦게 제대를 했는데 나 군대 있을 때 사주를 했드라구. 어머님이 나 알지도 못허게. 그래 내 사주를 파했어. 쪼끔 있다가 사촌 누님이 갈산에 사는디 그 양반이 중신했지. 다섯 살 차이. 삼 남매 뒀지. 아들 둘, 딸 하나.

늘 막걸리 두 병 먹었어. 신고허지 말어. 보통 두 병 먹어. 어떨 때 세 병도 먹고. 때에 따라 상관읎어. 내가 술 원체 먹으니까 모르는 사람 읎어. 마흔 살 때부터. 넘 부끄런 얘긴데 고부간에 입실래기가 났어. 그럴 때 누구 편 들어? 나가는 게 좋지? 나가면 워디 가냐? 술 안 먹으니 갈데가 읎잖여. 술집에 가 봤어. “잘 왔다. 술 한 잔 먹으라.” 착착 받지. 처음엔 취했지. 한 잔 먹다 한 병 먹다 세 병까지. 술 먹는다고 뭐라 안 혀. 애들도 집사람도. 식당 같은데 가도 내가 유머 있지 욕지거리 이런 거 안 혀. 퉁발 안 혀. 많이 먹으면 집에 와서 자는겨. 술 뵈도 어른들한테 뵈야 혀. 우리보다 열 살 더 먹은 어른들한테 뵜어. 옛날 어른들은 점잖게 마셨거든.

머니는 여든 살 못 잡수고 돌아가셨어. 우리 어머니가 앓지도 않구 사흘 앓고 돌아가셨어. 그래서 내가 너무 서운혀. 제대로 약도 못 써보구 돌아가셔서. 속으로는 아팠는데 표현을 안했지. 그때만 해도 내가 일 하고 바깥 돌아다니니 어쩐 줄 알았깐? 불효를 했지. 자식들 때문에 고생 많이 혔는디 호강 한 번 못 시키고. 지금 놀러라도 대니지만 그 때 뭐 있었깐? 워디 식사라도 대접했어야 하는디 지금 와서 후회가 되더라구.  

작은 키에 구부정하게 굽은 허리에 뒷짐을 지며 천천히 걸으시는 아버님의 뒷모습을 보니 그 작은 체구 어디서 그런 힘이 솟을까 싶습니다. 친구들과 장날이면 만나 술 한 잔 걸치는 것이 삶의 낙이요 재미라며 해맑게 웃으시는 아버님을 뵈니 문득 막걸리 한 잔에 잘 익은 총각김치 한 입 베어 물고 싶습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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