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소피, 삶 그 자체다
상태바
필로소피, 삶 그 자체다
  • 한학수 칼럼위원
  • 승인 2018.08.09 09: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 인간의 영역을 기계나 로봇이 대신하는 시기가 닥쳐오고 있다. ‘한 가지만 잘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은 이젠 잊힐 문장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은 멀티 플레이어 유형이 아니면 어림도 없다. 팔방미인의 시기가 도래한 셈이다.  “통섭형 인재는 이것저것 조금씩 잘하는 팔방미인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우물 하나가 확실히 있되, 다른 전문 분야에도 충분한 소양을 갖춰 그 분야 사람들과 공동 연구를 할 수 있는 인재가 통섭형 인재의 전형이다”라고 생물학자 최재천도 미래형 인재를 언급한 바 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법률 따위의 문화에 관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문화의 산물을 선택하고 판단하는 것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사람이 사유 없이 학문을 배우기만 한다면 지식은 축적될지언정 실용적인 문제해결 능력과의 거리는 요원해진다. 그렇다고 학문의 도움 없이 자기 생각만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경험과 좁은 시야 탓으로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다 보니 삶 자체가 풍요롭지 않을 수밖에 없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문제를 논리에 맞게 풀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사람의 눈과 생각은 관습이나 편견에 묶여있는 경우가 많아서다. 복잡한 시대를 헤쳐 나가려면 하나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그들이 모여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미래로 가는 길’ 일 테니 말이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멋진 시계는 얼마든지 살 수 있겠지만 ‘골든타임’은 지나면 살 수 없다. 돈도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탄다. 가치 있는 삶을 갈구한다면 지금(只今)을 거머쥐어야 하는 이유다. 평소에 갖고 있던 편견이나 습관, 통념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람들은 바람처럼 자유롭다. 다만 혼자의 힘으로 ‘다른 생각’, ‘다른 삶’을 만들어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신경림 시인도 ‘갈대’라는 시에서 ‘산다는 것은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고 읊고 있다. 짧은 길을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먼 길을 가려면 같이 가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철학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하며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즉 생각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때 간혹 습관의 지배를 받는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 ‘내가 있다’는 것의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철학적인 삶은 ‘주어진 삶을 그럴듯하게 가꿔가는 테크닉’인 셈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로 사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겠다’고 했다. 먹을 것만 탐내는 생각 없는 사람으로 사느니 굶주리더라도 생각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깊게 관여한 독일 관료 ‘아히히만’은 이스라엘의 한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거기서 그는 “명령받은 일을 성실히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을 취재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는 아주 부지런히 일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부지런함을 탓할 수 없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파스칼도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전시적인 삶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관조하는가’를 우선해야 한다. 아울러 자신의 속도에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다. 미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으니까.

한학수 <청운대 방송영화영상학과 교수·칼럼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