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생각허니 창살 없는 감옥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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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허니 창살 없는 감옥이대”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8.1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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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11>
이은숙 1945년생으로 장곡면 화계리에서 태어나 장곡면 상송리로 시집왔다. 장곡초등학교 32회 동창인 남편을 중신으로 만나 5남매를 키우고 지금도 밭일이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가 어떻게 하면 벌고 어떻게 사나 그런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여. 장곡면 화계리에서 태어나 23살에 일루 왔지. 이 사람이 장곡초등학교 32회 동창이여. 난 몰렀지. 졸업은 했어도 동생들 봐주고 어머니 일 봐주느라 핵교는 운동회 때나 가. 운동회라고 가야 내가 뭐 운동 연습을 했나, 그렇게 빠졌다 가고 빠졌다 가고 해서 동창들 만나두 몰러. 난 알았는데 안 갈라 했어.(옆에서 남편 김동하 씨의 말) 그러니 밥순이로 확실히 알고 데려온 거여. 아주 모르는 사이가 아니니까. 우리 어머니가 장다리 크다고 사위 삼더니 장다리 적은 나만도 못 혀. 기거에 혹 했는디 장다리 큰 거 아무 소용읎어.

 집이 뜯어 고친 지 거의 60년 되았지. 그 때 한참 유행이었어. 살기 편하라구 이렇게 고치고 나서 좋다고 하다가 남들 다 새로 지니까 이거를 뜯을 수도 읎구 그러다 보니께 이렇게 생겼어. 난 이런 집에서 평생 살게 생겼어. 놀면 뭣혀? 호박이 수박 되나? 농사꾼 일은 판박이로 소문난 사람인디 난 그게 몸이 뵈았어. 내가 근력이 읎다 했더니 아줌마 잡숫는 거 봐도 그렇고 근력이 없는 게 아니라 허리가 구부러져서 다리가 말을 안 듣는 거라네. 난 뭐를 허리를 펴서 걸음을 걸을라 하면 무릎 여기가 힘이 읎어. 그래서 나이는 얼마 안 됐는데 구부정한 할머니가 됐잖어.

댁은 친정보다 산다고 유세 떨더만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게 많아. 내가 와서 보니께 밥만 우리보다 많지, 바깥에 매달린 스피커 있잖어? 그것두 읎구, 나는 열일곱 살 때부터 트랜지스터 라디오 듣고 살았는데 그것두 읎어. 세상에. 우리 친정집이 멀지도 않아 요긴데 거기는 전기도 여기보다 먼저 들어오지 전기밥솥 쓰지, 그런디 여기는 가마솥에다 삼시 거기다 밥은 많이씩 먹으니까 우리 집은 밥을 쪼금만 해도 먹었는디 여기 오니께 바가지 이만한 거에 해, 쬐끄만 손으로 힘겨웠지. 여기 오니 라디오가 있나, 스피커가 있나. 이 아랫집 라디오 듣고 그래가며 살았네. 그래도 안 사줘. 좋은 거 살라 그런대. 일제 산다나? 어디서 일제 재고 사 왔드라고. 사 왔으면 뭣 혀. 시동상이 안고 다니지, 시아버지가 안고 다니지. 내 차례 오지도 안혀. 내가 그거 들고 앉아 있을 시간도 읎어. 흑백 테레비 그거 사다 노니께 담배 피는 할머니가 그냥 텔레비 본다고 앉아 있더라구. 그러다 우리 아들 축농증 걸렸어. 담배 구더기 속에서 아들 손자 생겼다고 좋다구 걔 뉘어 놓구 다 걔만 붙잡고 있는겨. 난 그것두 모르구 어차피 노는 할머니, 할아버진께, 밥 때 되면 우리가 경로당 같았어.

가 일을 안 배워서 모르는 게 많드라구. 아홉 식구, 시아버지, 시어머니, 큰 아버지, 큰 어머니, 시동상 두울, 열세 살짜리 쌍둥이 시누, 우리 두울. 내가 인저 애 낳고 열한 식구까지 살았어. 할아버지 저기 하나 앉아 있구, 그러니 뭐, 눈이 얼매나 무서운 시어른들 눈이 많아? 밥 먹구 빨래하구 또 점심 시간되면 밥 먹구, 치고 나면 또 저녁 허야 허구. 그 땐 한복저고리 다 뜯어서 말르면 다름질허야 허구. 그 시절만 해도 며느리를 막말로 식모처럼 알드라구. 밥순이로 데려온 거지. 사랑으로 보는 거 하나두 읎어. 처음엔 농사짓는 거 안 하구 사오년 간 밥순이만 했지. 그러고 보니께 농사 쪼끔 짓는 거를 식구들이 다 장정 됐잖어. 그냥들 먹구 놀구서는 뭐 할 때 됐다 되면 일손 얻으러 데니더라구. 오늘 보리 뵌다 하믄 하루 이틀 허구, 그렇게 하더라구. 그러니께 배우는 게 생전 읎구 도시 나가서 공부하는 것두 아니구 그게 뭐랴? 학교 가르치는 것두 아니구. 우리 여동생은 중학교도 가고 남동생도 대학교까지 가고 그랬는데 우리 어른들이 철통같이 맥혔어.

중에 재금 내준다고 하더라구. 큰어머니하고 저 이하고 그렇게 네 식구만 살 줄 알았는데 밥 해주지, 빨래 해주지, 얼매나 좋아? 어따 내놓고 싶어? 근디 한 삼 년 살아본께 약이 오르더라구. 며느리 얻지도 않았는데 삼베 매아서 다락에다 한 틀 올려놓고 또 한 틀 올려놓고 며느리 오면 짜게 한다구. 기가 맥혀. 그러구서 그걸 쪼끔 배웠지만 내가 뭐 선수여? 요즘에 그거 누가 하냐구? 악착같이 안 배웠지. 내가 꼭 해야 할 거 같으면 배웠지. 앞으로는 안 해도 된다 그래서 쪼끔 도와드린다 차원에서 해보다 왔는디 내 위로 누나가 있는데 그런 거 안 했나봐. 그 형님 모시베 짜고 입도 못해보고 돌아가셨어. 폐병 앓는 시누를 서른두 살이 되면 그 모시베를 왜 짜주라 한댜? 딸 병들어 죽게 생겼는디? 그러니께 내 것만 시키는 것두 아니더라구. 그냥 그 때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시절이었으니까. 살고 보니께 가만 생각허니 창살 없는 감옥이대. 뭐든 곱쟁이 일했어. 그 땐 뭐 간식거리가 읎은께 한 달이면 쌀을 잡곡밥 세 짝을 삶아 먹드라구. 그 때 80키로를 한 짝이라 했어. 밥을 거짓말 안 하고 놋그릇에 수북수북 퍼야 혀. 반찬은 뭐 고급 반찬 먹을 수 있나? 보통 김치나 짠지, 콩조림 많이 해 먹구. 나는 친정서 토마토, 오이, 참외, 우리 아버지가 아파도 이것저것 다 해서 먹는디 여기 온께 아무것두 읎어. 밥 밖에 읎어. 사계절 내내. 시장에 가서 사기 전에는 여름 과일도 읎어. 농토 아무리 있어도 소용 읎더라구. 농토 있어야 사용도 헐 줄 몰러.
 


다 보니께 애들이 늘어나구 돈이 필요허구 하잖어. 그래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내가 바깥으로 뛰어나갔지. 그 때 논 한 다랑이를 간다고 사람 사서 간다 하더라구. 그래 내가 시동상하구 우리하구 비고 내가 아버지한테 넘 주는 품삯 우리가 쓰자고 그랬더니, 아따 시동상들이 내가 나가니까 반찬이 부실하잖어. 김치를 상바닥에 질질 흘려가며 먹어, 그리구 품삯도 못 받았네. 그러니 화가 난 거야. 일만 되어지게 하구. 살림을 아무리 해도 할아버지 호주머니 하나여. 아무도 읎어. 돈은 일절 읎어. 그러다가 내가 시장 나갔지. 채소 기르고 아버님이 시장 출하하고 남는 거 마늘도 까고 버리는 것부터 시작했어. 근디 재밌어. 나도 돈이 있다. 그 눔으로 애들하고 나하고 쓰는 거지. 주방 살림도 자꾸 바뀌잖어. 내가 제일 먼저 사고 싶었던 거가 수저집. 19명 식구 상 보는데 필요하잖어. 제일 먼저 그거 사구 가스레인지도 사구. 돈 되는 거 심을 거 있나 봐 가지구 심어서 그 눔 갖다 팔구 그 재미로 살았어.

가 서른일곱 살인가 서른여덟 살인가 큰 애가 6학년 쯤 됐어. 그 때부터 보따리 장사 했어. 사과나무 심었어도 실패하고 관리를 헐 줄 아남? 근디 요렇게 새파란 사과가 열렸는디 아까워. 그래서 내가 퐁퐁이가 그 때 처음 나온 때여. 저기다 물 떠놓고 막 닦으니 깨깟해지데. 밭 매다 먹어 보면 달어. 상품으로는 못 허구 장곡에 구멍가게가 몇 있어. 거기 가믄 어지간히 팔았어. 넘 부끄러운 것두 읎대? 애들 가르킨다구 벌고 다니께. 옛날에 기저귀 가방 하나 있으면 좋겄는디 내가 도토리 따서 그거 산다고 도토리 따러 갈라 했는디 길을 막고 못 가게 하는겨. 시아버지가. 안 컬랑 다 알아서 해 줘야지. 사다 달라니께 딸 시켜서 커다란 가방 사가지고 왔어. 아, 이놈의 거 가지고 어디 등산 다니나? 애 업구서 기저귀 가방 털레털레 갈라믄 쪼그만 게 좋잖어. 1학년짜리 학교 보내면서 오래 쓰라고 큰 가방 사줬다고 그러잖어. 그거랑 똑같어. 

리 애들 열여섯 먹어 다 올려 보냈지. 첫째는 막내 고모가 삼년간 밥을 해 주겄다고, 그래 고모랑 고모부가 항상 고마워. 책상도 새로 사줘가며. 우리야 좋지. 생활비, 부식비 주고, 양념, 기름은 당연히 가는 거고. 고모 덕으로 우리 애들이 편케 살았어. 우리 애들이 시골서 살 때두 바깥으로 나가 돌아다니지 않구 맨 지들끼리 방에서 놀아. 텔레비전 보다 누나들 공부하면 따라서 공부하고. 그 때는 종이도 얼매나 귀했나? 누나들 띄어쓰기 하는데 그 빈 공간에 썼던 모양이야. 우리덜은 알덜 못허지. 애들 들여다볼 시간이 읎은께.

 동갑내기 부부는 아옹다옹, 티격태격 하며 52년을 같이 사셨습니다. 그 시간 동안 어머니는 자식들 가르치기 위해 힘든 일 마다않고 일했습니다. 지금도 버릇이 돼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합니다. 농토는 정리했지만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면 부지런히 달려갑니다. 어머니, 이제 조금씩 쉬어가며 일하십시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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