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지명 회복은 정체성 찾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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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지명 회복은 정체성 찾는 길
  • 허성수 기자
  • 승인 2018.09.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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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충남·세종향토사대회

고려시대 때 홍성모습 조명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으로 열린 충남세종향토사대회에서 참여한 내빈과 학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충남·세종향토사연구연합회(회장 최석원)는 지난달 28일 고려건국 1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홍성문화원에서 제11회 충남·세종향토사대회를 열고 ‘고려시대의 홍성’에 대해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개회식에서 최석원 충남세종향토사연구연합회장의 개회사, 이종수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장의 환영사, 김석환 홍성군수와 홍문표 국회의원, 김헌수 군의회 의장의 축사가 있었다.
이 날 김경수 청운대 교수의 ‘홍주 지명의 변천과 홍주천년 기념사업’을 시작으로 김명진 경북대 교수의 ‘고려 통일전쟁기 운주성(홍주성)과 왕건·긍준(홍규)’, 문경호 공주대 교수의 ‘최영 장군과 홍성’에 대한 주제발표가 있었다.

김경수 교수는 “1018년에 성립된 홍주는 조선시대 내내 ‘목’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 서북부지역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 서해안 방어의 군사적 요충지, 내포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크게 쇠락하고 위상도 격하된 채 홍주라는 지명조차 사용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제라도 과거 역사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역의 본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며 “‘홍주’로의 지명 회복은 홍성의 정체성을 찾고 나아가 일제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김명진 교수는 10세기 전반 고려 태조 왕건이 수행한 통일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홍성군에서 벌어진 운주전투를 꼽으면서 당시 운주에는 유력한 호족으로 긍준이 웅거하고 있었는데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자위권을 행사하는 성주라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대동지지’에 1012년까지 운주였다가 1018년 고려 현종 때 홍주로 이름이 바뀌어 나타난다”며 “고려 통일전쟁기에 홍규와 그의 후손들이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과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 때문에 자신들의 성 씨를 따서 운주의 지명을 바꿨을 것이다”라고 추정했다.

문경호 교수는 “최영 장군은 한 사람인데 4개 지역에서 출생지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홍성 외에 철원·고양·개성설에 대해 차례로 소개한 후 그 가운데서도 최영과 관련한 유적이 가장 많고 관련 지명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 홍성이 최영의 출생지로 유력하다며 무게를 실었다. 문 교수는 최영의 출생지로 언급되고 있는 철원설은 최 씨의 본관일 뿐이고 실제 출생지는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 개성설은 사료에 집터가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출생지로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며 고려시대 수도에 관료로 살면서 집터가 있었을 뿐 출생지로 보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고양설도 아버지와 최영의 무덤이 남아 있을 뿐 출생지는 아니다고 문 교수는 반박했다.

마지막으로 윤용혁 공주대 교수, 이정란 충남대 교수, 조원찬 갈산고 교사가 패널로 참여한 가운데 토론이 이어졌다. 이어서 제2부 ‘고려시대의 충남·세종’에 대한 주제발표가 있었다. 류용두 서산향토연구회원의 ‘류숙의 한시를 통해 본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역사인식’, 전상진 홍주향토문화연구회원의 ‘구산선문 원융한 홍주의 태고국사 보우’ 등의 발표가 이어졌다.

이 날 향토사대회는 홍주향토문화연구회(회장 안병주)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원장 이종수)이 주관하고 홍성군이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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