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은 알고 있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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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알고 있다②
  • 김주호 <한국스카우트 충남연맹 이사>
  • 승인 2018.08.3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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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8일 역사적인 청산리대첩 전적지를 참배했다. 군과 민의 일치 단결에 김좌진 총사령의 치밀한 작전, 홍범도, 이범석, 나중소, 최인걸 장군을 비롯한 2000여 우리 독립군은 2만(1:10)여의 일본군과 교전해 3300여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낸 청산리 대첩은 근대식 무기를 갖고 싸운 1910년 이후 근대전 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통쾌한 승리였으며, 2차 대전 말기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6·25때 인천 상륙 작전, 다부동 전투보다 더 통쾌한 전무후무한 대승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독립군도 20여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특히 최인걸 장군의 전사는 두고두고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안타까운 순국이었다. 최인걸 장군은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기관총부대장으로 활약한 맹장으로 마지막 날 온 몸에 총상을 입어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게 되자 허리띠를 풀러 오른손을 기관총 총신에 묶은 다음 “원수 놈들 한 놈이라도 더 죽이겠다”면서  마지막 숨이 다 할 때 까지 방아쇠를 당기다 장렬히 산화했다. 

이 최인걸 장군의 화신이 2002년 연평해전 참수리호 조타장 한상국 상사로 옮겨온 듯 북한의 불법 기습공격으로 배가 반파되고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한 상사는 “나는 배를  살릴 테니 너희들은 부상병을 살려라”고 외치면서 왼손을 운항키에 묶고 배와 함께 사투를 벌이다 침몰 장렬히 산화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런 충절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번영된 조국이 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주먹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일송정에 올라 용정 시내를 바라보며 잠시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간도 가졌다. 항일 가곡 ‘선구자’ ‘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을 목이 터져라 몇 번씩 부르고, 저항 시인 윤동주 생가에 들러 윤 시인의 서시를 암송하며 안타깝게도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1945년 2월 작고) 일제에 의해 목숨을 뺏긴 윤 시인을 추모했다. 윤시인의 생가를 나와 15만원(현 시가 100 억원)탈취비를 참배했다.

최봉설 선생을 비롯한 ‘철혈광복단’ 6명이 회령에서 용정으로 가던 현금 수송마차를 습격해 탈취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무기 구입과정에서 전 의병장 엄인섭의 배신으로 도로 빼앗기는 절통한 사연이 있었지만, 1920년 벽두에 일어난 이 사건은 같은 해 6월 봉오동대첩과 10월의 청산리 대첩에 영향을 준 의미 있는 거사였다. 

3·13 반일 의사릉을 참배하면서 3·1운동을 반추했고 서전서숙(이상설 선생이 설립, 현 용정중학교)을 돌아보면서 교육으로 구국 운동에 헌신했던 선열들을 추모했다. 용정에서 1박을 하고 오전에 봉오동 전적비(홍범도 장군)를 참배하고 도문에 가서 조.중 다리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며 통일 의지를 다짐하고 아쉬움을 달랬다.

중식 후에 상경성(발해의 마지막 수도)에 갔으나 낡은 성곽에 꽃과 풀이 무성한 황량한 벌판 같은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해동성국 발해의 찬란했던 문화를 섭렵하려 했으나 유물 유적이 너무나 빈약해 또 한 번 열통이 터졌다. 중국 땅이라서 우리 마음대로 발굴 보존할 수 없는 한계점은 있으나 일제 강점기 우수한 발해 문화 유물을 일본에 반출한 폭거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발해왕국의 원찰이었던 흥륭사에 들러 쌍사자석등(교과서에 소개)을 살펴봤다. 문화재 식별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쌍사자 석등이 국내에 있었다면 국보로 지정될 만한 걸작임에 틀림없었다.

저녁 늦게 한중 우의공원(기념관, 숙소, 식당, 예식장, 쉼터 포함)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이 한중 우의공원은 정부(국가보훈처)와 민간(탤런트 송일국)의 합작품으로 해외에 건설한 유일한 현충종합시설이다. 다음 날 우의공원을 출발해 김좌진 장군이 순국하신 산시진 정미소를 견학하고, 흉상 앞에서 조기준 단장이 김 장군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하고, 장군의 별명 3가지를 설명해줬다. 별명 3가지는 ‘한국의 링컨(노비 해방’), 만줏벌 호랑이(청산리대첩), 고려의 왕(재만 동포들의 삶의 질 향상)이다.

청산리대첩 이후 경신참변과 흑하사변을 거치면서 위축되고 산재된 독립군을 재무장시키고 일본군과의 일전을 벼르던 장군은 재만 한족총연합회 주석에 취임하신지 3개월만인 1930년 1월 24일 당신이 세우신 금성정미소에서 공산주의 청년당원 박상실의 흉탄에 서거하면서 “할 일이 태산인데 내가 죽다니 그게 한스러워”라는 피맺힌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참으로 조국의 불행이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후에 해림실험소학교(김좌진 장군 설립)를 견학했는데 가슴이 아팠다. 동포 자녀들이 다니면서 민족교육을 받고 있는데 교육환경이 우리나라 70~80년대 수준으로 열악하기 때문이다. 다시 우의공원에 와서 전시관을 관람했는데 이 전시관에는 의미 있는 글이 있다. 이것이 바로 ‘무오 독립선언서’다. 3·1운동 직전 김좌진 장군 이회영, 이동녕 선생이 주축이 되어 3·1독립선언(기미독립선언서)보다 한 발 앞서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무오독립선언→2.8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3.1기미독립선언 순이다.

모처럼의 자유 시간을 거쳐 저녁에 지도교수 강의 및 질의응답, 부모님께 편지 쓰기를 한 다음 대원 장기자랑(레크리에이션)이 펼쳐졌다. 청소년 대원들의 생기발랄한 노래와 춤, 촌극이 어우러져 한 시간 넘게 진행됐다. 우리는 청소년 시절에 해보지 못했던 것인데 어찌나 잘 하고 재치가 넘치는지 시간가는 줄 몰랐다. <계속>

김주호 <청산리역사대장정 지도교수·스카우트충남연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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