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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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에서
  • 최복내 칼럼위원
  • 승인 2018.09.2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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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명절 때 편안한 고속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많아졌다. 며칠남지 않아선지 어렸을 적 기차여행의 그것들이 아스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친구들과 철로 있는 곳에 놀러 가면 철로에 귀를 대고 먼 곳으로부터 달려오는 바퀴소리의 울림과 바람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기차 길 두 줄을 주∼욱 바라보면 머∼언 산등성이를 넘어서 어느 곳에라도 다다를 것 같아 걷고 싶었지만, 두 줄의 선로사이가 멀어질수록 사이가 좁아져서 만나는 것이 원근법 이라는 것을 모르는 나로서는 의문이고 불안요소가 되기도 했다. 서울 가셨던 형님 마중을 나가서였다. 지치고 배고파하는 사람들이 쭈그리고 앉은 대합실을 지나 플레트홈을 나서니 아스라이 머∼언 바램의 신호처럼 가물가물 다가오는 반짝임, 목을 늘이고 선 내 앞으로 거센 파도처럼 열차가 다가선다.

반가운 형님 마중보다 어둠을 뚫고 올려다본 하늘에선 그들의 눈자위 같이 붉은 달빛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남과 해어짐의 환희와 짙은 슬픔을 눈여겨보던 자리에서의 기적소리는 구슬프게 오래오래 남아 집으로 돌아오는 발밑에 깔렸다. 진초록의 물감을 쏟아 놓은 보리밭을 가르며 지나던 차창 밖의 풍경, 산모퉁이 하나를 돌고나면 옹기종기 동네가 보이고 동구 밖의 미루나무 둘래와 황소가 풀을 뜯는 전원 풍경 내가 갇혀있던 곳을 비로소 멀리서 바라 볼 수 있었던 기차 안, 깨끗한 학교 운동장, 그 때 본 논과 밭, 그리고 숲의 빛깔은 반 고호의 그림같이 선명한 빛깔로 남아 있지만 이젠 지나쳐 봐도 그때 빛깔이 아닌 것 같아 아쉬워진다.

기나긴 지구의 맥(脈)같은 기차 길을 따라 보헤미안처럼 떠돌아가는 생명의 울림, 박동 같은  신호라도 울려온다면 우리 삶은 막연하거나 고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거센 파도처럼 기관차가 다가 올 때 모래톱에 게와 조개 등 반가운 것들이 고개를 내어 밀듯이 우리에게 반가운 일들이 태어나기도 하고 가을비가 내리고 무서리가 내려 다소곳해지는 철길, 바람이 억세게 휘몰아치는 밤의 러시아 기차 안에서 자신을 버린 네프로도프 백작이 동료들과 희희낙락 할 때 머플러를 휘날리며 철길을 돌아서던 카슈사의 비애의 눈물로 얼룩져 있으리라. 기차 길과 기차에 얽힌 애환과 낭만은 그 역사와 함께 길게 이어진다. 몇 십리 밖에서라도 기적소리가 울리면 앞치마에 손을 씻고 징용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뛰쳐나오던 아낙들, 천고의 신비를 담은 심산의 절간에도 시공을 초월한 기적소리에 번뇌를 달래보던 불심. 수채화처럼 산뜻한 날, 언덕에 올라서서 동서남북을 몰라도 그 길만을 따라가면 벅찬 도시에 닿아줄 것 같던 좁은 가슴이 아니고, 이젠 대범 아닌 무감각의 답보를 계속하고 있다. 어릴 때 혈맥이 되어있던 기차 길, 곳곳에 피와 눈물과 땀이 얼룩진 선로에서 민족의 얼과 혼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기적소리가 길게 울릴 때 향수에 젖어 생활의 여운을 찾던 밤, 사라질 듯 이어지던 소리에서 잊히지 않는 음성을 은은하게 남기고 간 선인의 행적을 뒤적여 보기도 했다. 차창 밖의 온도와 안의 기온이 달라서 입김이 서려 내리듯 이질적인 사람들로 꽉 메워진 기차 안. 기적의 메아리 없는 기차 안에서 옆의 꼬마는 3등 디젤열차의 울림을 베개 삼아 잠이 들어있다. 책임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와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에 기적의 여운이 사라진 대신 선명한 빛깔의 자취를 남기고픈 여유에 잠겨 본다.

최복내<숲속의힐링센터 숲 해설가·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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