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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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空間)
  • 최복내 칼럼위원
  • 승인 2018.10.1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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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책을 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남산과 가까운 오관리는 조금만 걸으면 근린공원 같은 남산이 나타난다. 집에서와는 다른 맑은 공기가 내 코끝에 와 닫는다. 나는 들길을 걷듯 천천히 발을 옮긴다.

오늘은 나의 마음속에 커다란 여유가 생겼다. 좋은 책을 읽은 여운 때문일까? 사람은 주위의 구속에서 벗어져 나올 때  희열을 느낀다. 자의든 타의든 괴로움이든 기쁨이든 대상에게 너무 묶여 있다는 것은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래선지 오늘은 완전히 자유 속에 나를 던져 놓은 기쁨이 있다. 높은 하늘에는 가을이 말없이 흘러가고 나의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空으로 꽉차있다. 세계는 무제한으로 터진 대공간이다. 그 공간속에 놓여있는 나는 또 하나의 공간을 소유한 생물이다. 허허함과 우주에 쌓여있는 나는 절대의 無 앞에서 무의 법열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무와 공을 구별한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까다로운 구별을 하고 싶지 않다. 텅 비어 있으니까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텅 빈 이대로다. 인간은 때로 욕망의 포로가 된다. 물욕 명예욕, 애욕, 탐욕 등 갖가지 욕망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그 욕망에 붙잡혀 있으면 생각이 작아진다. 위축되고 외소해지고 소심해지고 추악하다. 그러나 욕망에서 발을 떼고 한번 벗어져 나오면 바다가 거기 넘실거린다. 지금 나는 무엇에도 붙잡히지 않는 자유 속에 발을 옮긴다.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무는 인간의 영원한 고향이다.

무의 바탕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무는 생명의 근원이다. 그 무를 깨닫고 보면 종교와도 같은 법열을 얻는다. 생도 사도 지금의 나에게 없다. 오직 있는 것은 공간과 함께 그 속에 부유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 존재가 세계와 더불어 함께 있어 이처럼 기쁨을 느끼는 모양이다. 가을바람이 와서 얼굴을 어루만진다. 다정한 연인의 정다운 손길과 같다고 할까? 인간은 때로는 죽고 싶도록 기쁠 때가 있다. 사랑의 극치를 경험하는 순간이라든가 예술적인 큰 충격을 경험하는 순간이라든가. 종교적인 법열을 감득하는 때라든가 그것은 순수 무상의 고귀한 욕망이 스스로를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고 한다. 사람은 낙엽을 보고 생명의 유한(有限)을 느낀다. 낙엽이 있기 때문에 사색의 부피를 더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낙엽에서 허무와 애상을 찾아낸다.

인생은 때로는 허무와 애상이 있어 오히려 일체감을 가진다. ‘밤을 새워 인생을 논해보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 어느 시인도 있다. 건전하기만 한 인생은 혹 행복하기는 해도 그늘이 없는 나무와도 같다. 고독을 아는 사람은 매력이 있다. 허무를 울어본 사람은 인간적이다. 고독과 허무에 패배하지 않고 그것을 굳게 딛고 일어설 때, 사람은 오히려 강해진다. 강하기만 한 사람은 위선자가 되기 쉽고, 약하기만 한 사람은 감상자(感傷者)가 되기 쉽다. 두 가지가 함께 이을 때 인생은 더욱 완전한 것이 아닐까? 낙엽은 일을 끝내면 미련없이 생명을 버리라는 암시를 준다. 가볍게 훌훌 날리듯이 멋있는 종말을 가져야 한다고 손짓을 한다. 낙엽은 허허한 낭만의 표상이다. 죽음도 일종의 낭만이 될 수 있다는 철학을 던진다. 어느 하루 예고도 없이 후두둑 떨어지는 낙엽처럼 깨끗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도 낙엽처럼 가야하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최복내<숲속의힐링센터 숲 해설가·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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