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君子), 인간다움의 실현을 위해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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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君子), 인간다움의 실현을 위해 살다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18.10.2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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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아카데미
사진 출처= https://image.baidu.com

“듣기 좋은 말만 하고(巧言) 낯을 가꾸는 데에 능한(令色) 사람에게는 ‘사람다운 면(仁)’이 적다.” 아마 논어의 이 말(巧言令色, 鮮矣仁)보다 인구(人口)에 더 회자(膾炙)되는 말도 드믈 것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달라서 이들이 하는 말을 곧이 듣고 살게 되면 낭패를 당하기 쉽다. 제왕학(帝王學)을 연구하던 자들에게 전해오는 말이 있다. “상대를 거꾸러트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칭찬하고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은밀하게 도와줘라.” 높은 자리에 오르면 열에 아홉은 자만한다. 또 상대의 칭찬을 받으면 본분(本分)을 잊고 우쭐댄다. 그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상대를 무너뜨리라는 말이다.

교언(巧言)의 ‘교(巧)’는 ‘좋다(好)’는 뜻이고 ‘언(言)’은 ‘말’이라는 뜻이다.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일에 능한 사람들은 사람을 잘 홀린다. 둥근 것은 ‘둥글다’ 하고 모난 것은 ‘모난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이들과 어울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모난 것도 ‘둥글다’ 하고 둥근 것도 ‘모나다’고 한다. ‘교언’에 홀려 정신을 잃은 까닭이다.

영색(令色)도 이와 같다. ‘영(令)’은 ‘착하다(善)’는 뜻이고 ‘색(色)’은 ‘얼굴빛’을 뜻한다. ‘얼굴빛을 착하게 보이도록 꾸민다’는 뜻이다. 자기를 좋아하게 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표정을 짓는 데 능한 아첨꾼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하기는 편해도 믿기는 어렵다. 만일 이런 데 능한 이가 접근한다면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자칫 삶이 황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이유는 품은 뜻을 실현하기 위함인데 이런 사람 때문에 시간과 비용을 허비해야 한다면 내가 바라는 것을 어느 겨를에 이룰 수 있겠는가?

진시황제(秦始皇帝)를 섬기던 환관 중에 조고(趙高)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고는 시황제가 죽자 유조(遺詔)를 위조해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했다. 어찌나 사람을 잘 홀리던지 호해를 한 손을 쥐고 흔들었다. 온갖 감언이설과 환란으로 유혹하더니 나중에는 교묘한 술책을 동원해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원로 중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승상이 됐다. 그리고는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조고가 한 말 가운데 경계할 만한 말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이사를 참수하면서 조고가 물었다. “당신 같이 학덕이 높은 분이 왜 나 같은 소인배에게 죽임을 당하는 줄 아시오?” 이사가 대답을 못하자 조고가 일러줬다 “소인배와는 일을 도모하지도 말고 믿지도 말고 화를 내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승상은 나와 같은 소인배의 말을 믿고 나와 함께 유조(遺詔)를 위조하고도 나를 욕하고 다녔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오.” 어느 날 조고는 사슴 한 마리를 어전에 끌어다 놓고 호해에게 말했다. “폐하! 저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폐하를 위해 구했습니다.” “승상은 농담도 심하시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그 무슨 소리요?” “아닙니다. 말이 틀림없습니다.” 조고가 짐짓 우기자 호해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제공들 보기에는 저게 뭐 같소? 말이오, 아니면 사슴이오?” 그러자 대부분 조고가 두려워 ‘말입니다’고 대답했다. 그나마 의지가 남아 있는 두어 사람이 ‘사슴입니다’고 대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사람을 똑똑히 기억해 뒀다가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러고 나니 누구도 감히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없게 됐다. 나중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유방(劉邦)의 군대가 수도인 함양(咸陽)으로 밀고 올라왔다. 조고는 어리석은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3세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똑똑한 자영은 등극하자마자 조고를 주살해버렸다. 천만 년 이어가길 바라며 ‘1세 황제’ ‘시황제(始皇帝)’를 칭했던 진시황의 대제국도 ‘교언’ 앞에서는 용을 쓰지 못했다. 귀에 거슬린다 해 충언(忠言)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조고와 같은 아첨꾼이 들끓는다. 그런 자들을 가까이에 둔 군주(‘暗君’)들은 진(秦)의 멸망에서 보듯 대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이상 네이버 지식백과 ‘지록위마’ 조에서 부분 인용)

말은 바르게 해야 의미가 잘 전달되고 가치가 바로 선다. 그런데 교언에 능한 사람들은 그 말을 뒤집어 “말을 바르게 하면 상대의 심기를 건드려 친해지기 어렵다. 상대에게 믿음을 주기 어렵다”, “가까운 사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자주 하면 사이가 벌어진다. 그 상대가 군주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치고 출세한 사람이 드믈다”, “말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든 예가 그와 같은 뜻이 아님에도 어의(語義)를 왜곡시켜 바른 말이 해악을 준다고 강변(强辯)한다.

이런 말도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입은 화를 불러오는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자기 몸을 베는 칼이니(舌是斬身刀), 입을 굳게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閉口深藏舌), 처하는 곳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몸이 편안하다(安身處處牢).” 상대가 무슨 짓을 하든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曰可曰否)하지 않는 것이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첩경(捷徑)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조금 심하게 말해서 ‘옆에서 나라를 팔아먹어도 모른 체 할 사람들’이다. 이 말을 지은 풍도(馮道)가 그랬다. 그는 세 왕조에서 승상(丞相)의 권세를 누렸는데 상대가 싫어하는 말과 행동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역대 최악의 간신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 풍도의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든 이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러는 것 같은데 결국에 가서는 조고와 풍도처럼 만고의 역적이요 인류의 적이 돼 오명만 남길 뿐이다.

모든 이와 원만하게 지낸다는 것은 모든 이와 척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도덕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이기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회에는 늘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본인 의사에 상관없이 시비(是非) 선악(善惡)에 휘말릴 때가 적지 않다. 이때 다른 사람과 척을 지는 것이 두려워 불의(不義)에 입을 닫게 되면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회적 가치를 외면했다는 오명(汚名)을 쓰게 된다. 인간다움을 구현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바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경계로 삼아야 하는 말도 있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젊었을 때 주(周)에 가서 노자(老子)를 면담한 적이 있다. 그때 노자는 떠나는 공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줬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 부자는 남을 전송하며 재물을 선물하고 인자(仁者)는 남을 전송하며 충고를 한다고 한다. 나는 부귀한 사람도 아니고 인인(仁人)이라고 자처할 생각도 없지만 한 마디 충고를 하며 그대를 보내고자 한다. 첫째 총명하고 깊이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죽음의 위협이 따른다. 남을 잘 비판하기 때문이다. 둘째 많은 지식을 갖고 떠벌이는 사람도 몸이 위태하다. 남의 단점을 잘 들추기 때문이다. 효자(孝子)는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충신(忠臣)은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공자의 까탈스런 성격을 걱정해 일러준 말인데, 역으로 생각하면 이런 성정을 지녔기 때문에 위대한 성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고 선한 표정을 잘 짓는 사람에게도 본심이 있을까? 그들은 수시수처(隨時隨處)에 말과 행동을 달리 하지 않는가? 어느 것이 진면(眞面)인지 알기 힘들다. 또 지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한다. 왜곡된 자의식 속에서 살다 생을 마감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삶, 자기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이들의 삶이요 운명이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인간다운 삶을 기대하기 어렵다.

군자는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 산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학문을 연마하고 출사를 한다. 그런데 군자임을 자임하고서 교언영색을 일삼는다면 삶의 의지와 포부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군자는 도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원칙과 소신(正言ㆍ正色)을 굽히는 따위의 행위(以道殉乎人1)1) “天下有道, 以道殉身, 天下無道, 以身殉道. 未聞以道殉乎人者也.”(『맹자』 「진심장구편」 상 32).)를 일체 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는 “이 세상에 인간다움(道)이 구현된다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朝聞道, 夕死, 可矣) 고 했다. 이런 삶의 자세에는 교언이나 영색이 끼어들 여기가 없다. 의로운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득달 같이 달려가서 행하고, 반대로 의롭지 못한 일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목숨을 초개 같이 여기며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공자는 14년간의 풍찬노숙에도 꿋꿋하게 군자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말을 삼가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공자는 말을 삼가는 것보다 말을 바로 하는 것이 더 중하다고 했다. 바른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민생이 파탄날 것이라고 했다(名不正……則民無所措手足). 사회 기강은 바른 말을 사용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사회의 안정과 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교언과 영색을 미워하고 정언과 정색을 받든 것은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선비들의 덕목이기도 했다. 그런 신념과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가 문란해도 사회에는 복원력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마음에도 없는 말과 표정을 지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곳이 돼버렸다. 아마 이것은 ‘쌍둥이 사이에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급변해 가는 현대 사회의 경쟁 시스템이 빚어낸 현상일 것이다.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손쉬운 수단으로써 교언과 영색이 만연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는 아첨꾼의 말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언과 정색을 쫒는 것이 당위요 도리임은 알지만 교언영색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순간적으로 본심(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善的 偏向性을 지닌 마음)을 놓치게 되고(放心), 어찌 됐든 ‘재미 있게’ 살아가는 데는 교언과 영색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삶이 일상화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삶의 태도가 우리의 삶을 해치고 종국에는 우리에게서 “인간다움”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교언영색의 노예, 인간답지 못한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달콤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위험하므로 공문(孔門)에서 학칙(學則)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 강좌는 홍성문화원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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