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얻어먹고 다니다시피 하고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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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얻어먹고 다니다시피 하고 살았지”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11.0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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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18>
윤봉순 1940년생으로 10살에 부모를 여의고 18살에 금마면 봉서리로 시집왔다. 이후 5남매를 낳아 보따리장사를 하며 모은 돈으로 방앗간을 사 집안을 일구었다.

 태어난디는 청양서 태어났지. 어머니 아버지가 나 열 살 먹어서 다 한꺼번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거기서두 넘의 불 때주고 밥 얻어먹고 그러구 컸어. 어머니는 음력 9월에 돌아가시구 아버지는 음력 10월에 돌아가셨지. 아버지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이것들을 으떻게 델고 사느냐구 그렇게 우시더니만 담달에 돌아가시더라구. 큰 언니는 시집을 갔었고 오남매가 나무 해다 주고 그렇게 살았지. 여동생이 다섯 살이었는데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 부산인가 어디루  보냈는디 애들 봐 주고 밥 준다고 해서 그 때 일곱 살에 부산 갔어. 그랬는디 거기서 밥도 안 주고 때리고 그러드랴. 연탄 땔 때인데 냉방에서 담요 하나 주고 자라 하더래. 밤에 몰래 나와서 부뚜막에 엎드려 잤대. 그러다 그 집 세 사는 이가 너 차 태워주면 갈만 하겠냐구 그러더랴. 때리는 거 보구 그런 거 보니 불쌍허다구. 그래 차를 태워줬는디 돈이 있어야지. 공주 와서 내렸는디 기사가 도루 실어다놓는다구 그러더래. 손님 중에 한 사람이 애한테 왜 그러냐구 그래서 거기 내려갔고 그 손님을 걔가 따라갔대. 그 집 가니까 그이네 딸네 사는 청주로 보내주드래. 거기서는 밥도 잘 주고 잘 지냈다고 하드라구, 그러다 열여덟 살 먹어 시집 가 고생허다가 지금은 괜찮어.

가 셋째, 다 얻어먹고 다니다시피 하고 살았지. 친척집이나 이런데 나가서 일해주고 그랬지. 우리 큰언니가 화양리서 살았는디 거기다 말해갔구 신랑 자리 괜찮다고 해서 왔는디 암것두 읎어. 농사 지을 것두 읎구. 노인네하구 시누 둘이 사는데 나 오니까 시누는 서울로 식모살이 하러 가고 내가 10월에 왔는디 2월에 군대 가드라구. 그래 나를 식모살이 보냈지. 홍성으로. 그 때만 해도 밥만 얻어먹기로 허구 갔는디 그 사람이 밥을 안 주드라구. 반찬 하나 없이 김치 대가리 뜯은 거 허구 밥 요만치 부엌에다 주고 먹으라구. 자기네들은 갖고 들어가서 먹구. 그런 집은 첨 봤어. 그 때만 해도 어리지. 내가 열여덟 살인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왔드라구. 내 시어머니 붙들고 울었어. 그랬더니 예산 비단장사허는 집으로 보내줘서 편트라구. 거기는 내가 밥도 맘대로 먹구 애들 다 거느리고 편했어. 신랑이 3~4년 군대 갔다 오더라구. 오니께 와서도 살 수가 읎으니께 이번엔 시어머니가 식모살이를 가드라구. 스무 살에 큰 아들 낳어. 신랑이 혼자 커 가지구 생활력이 읎어. 죽으나 사나 일을 해야 허는디 일을 안 혀. 그래 내가 장사를 시작했지.

복, 양말 이런 거 떼다가 넘 부끄러워서 서산 이런데로 갔어. 그것두 하루이틀이지 거기서만 못 뎅기겠더라구. 멀어서. 그래 여기루 뎅기러 다녔지. 그 때 쌀 한 되면 우리 식구가 종일 밥을 먹어. 근디 장사 허니까 쌀을 하루 다섯 되를 버는겨. 그래 시작해서 돈 벌고 논두 사고 밭두 사고 방앗간도 83년도에 샀어. 방앗간에 사람 두고서 일 허는디 그것두 수컷이라고 자꾸 사람을 괴롭혀. 살 수가 읎어. 아들이 방앗간 한다고 들어왔는디 며느리가 도시서만 살아서 못 살어. 어느 날 친정아버지 제사라고 해서 내가 돈 10만 원을 줬어. 근디 갔는디 안 오는겨. 아들 보고 오라는겨. 그래 그 아들이 나갔네. 방아를 찧어야 돈이 나오는데 내 죽을라고 냇가를 들어갈까 그 때는 그런 생각도 했어. 근디 벙어리 이발소 아저씨가 왔드라구. 나보구 으찌 사냐구. 그래 아들이 있어도 하나도 안 도와주고 힘들다고 죽을라 그런다 그랬더니 손짓으로 그러다라구. 그랬더니 그이가 와서 소밥을 지어줬어. 그러고 있다 어느 날 장에 갔다가 친구를 만났어. 친구가 으떻게 사냐구. 나 이만해서 죽을라 한다 그랬더니 죽지 마 방앗간 팔아. 어디가 설거지만 해도 돈 50만 원은 받어 그래. 그래서 그냥 안 죽고 으떻게 하다가 저 아들이 들어와서 허고 있어. 우리 아들이 인천서 장사를 시작했어. 처음엔 잘 안 되고 나보구 책임지라고 그러더라구. 새벽에 기도를 했어. 그랬더니 걱정말라구 그러더라구. 그러더니 이젠 아주 잘 돼. 잡곡, 콩, 이런 거 팔아서 지금은 돈 잘 벌어. 배웠으니께 장사해도 좋은겨. 이제 애들이 니것 내것 읎어. 다 형제들 살게 해주고 그려. 지금은 엄마가 고맙다고 남자도 어려운디 그렇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려.

눈 오면 눈 맞고 가고 비 오면 비 맞고 가고 그렇게 교회 갔는데 요 근래는 아파서 몇 번 못 갔어. 그 때 고생 안 한 사람 없는데 나는 하느님 빽이라 생각해. 지금은 우리 아들이 하루 다섯 번 씩 전화해. 엄마 엄마 한대. 엄마 젖 먹나 왜 그란대 헌대. 아들이 엄마 살았을 때 다 해준다고 어렸을 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엄마 용돈 쓰기 싫다고 헐 때까지 준다고 했대. 그 때 하두 어려우니께 자기는 머슴이라도 해서 부자로 살지 이렇게 가난하게 안 산다고 그랬슈. 핵교 다닐 때 보리밥만 변또로 싸줬어. 중핵교 고등핵교는 다 헌꺼번에 수업료 냈어. 염생이를 맥여서 새끼 낳으면 그걸 팔면 한 번 수업료는 냈어. 내 식구들 굶기고 장사 보따리 들고 나가 일허면 맘이 편혀? 돈 받고 팔면 도루 들어와 국수 사가지고 와서 삶아주고 다시 보따리 이구 나가구 그랬지. 어린애도 다 집이서 낳는디 일주일 동안 먹을 게 읎어. 애 놓은지 닷새만에 보따리 이고 나가는겨. 먹을 게 읎으니까. 그 애들 다 젖을 못 멕이고 쌀을 과서 물을 받혀서 젖통이 읎으니까 사카린 타서 그리 맥이고 했어. 그래도 괜찮대? 지금도 큰아들은 사카린 타서 밥 말아먹고 술은 안 먹어. 다른 애들은 장사 갔다와서 조금이라도 맥였는디 큰 아들은 젖이 안 나와서 못 맥였어. 우리 시어머니 고생 많았어. 그 애들 다 키우고서 막내아들 네 살인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어. 맹장 때문에 돌아가셨어. 약이 있어야지. 병원도 읎구. 지금두 시어머니가 그렇게 보구 싶어. 남편은 안 보구 싶어. 시어머니가 불쌍혀. 밥도 배부르게 한 번도 못 먹었어. 손자 낳기만 허면 그렇게 좋아해서 업어주고 배고프면 밥 해 먹이고. 어려운 줄 몰르고 그 애들 다 키웠어. 내복 같은 것두 못 입구 홑껍데기 같은 거 입고 달달달 떨며 서울 다니고 옷 가져와 팔고 그랬지. 그 때 쌀 200짝 주고 샀어. 내가 쌀계를 모았지. 돈계도 허구 그래서 방앗간을 샀지.

수 안 믿었었어. 앉은뱅이가 돼서 일 년을 못 걸었어. 그 때 별 짓 다 해도 안 낫는겨. 무당 들여서 굿도 허지 병원 다 데니지 안 나. 못 걸으니께 리어커 네모진 거 밖에 읎었어. 우리 아저씨가 나를 거기 싣고 거길 갔어. 시어머니 돌아가고 나서 아프기 시작허더니 안 낫는겨. 거길 갔는디 목사님이 그러더라구. 다 했응께 병원이고 푸닥거리 다 끊으라구. 그 때부터 기도를 허는디 보통이 아녀. 2주 만에 다리가 펴졌어.

리 신랑은 땅도 읎지, 일도 안 허지. 그 땐 읎으니께 일이라도 다녀야 허는디 안 혀. 그때만 해도 맨 술집이잖어. 술 먹으러 대니고 외상이라도 먹구. 옷만 번지르하게 입구 화투 치고 술 먹고 세상 넘 부끄러워서 술집 아가씨허구 돌아다니니. 내가 얼매나 뭣 허겄슈? 아배만 협력했어도 돈 더 벌었지. 홍성에 가게라도 사고 그랬겄지. 시집 오니 솥단지도 읎구 밥 퍼 먹을 그릇도 읎어. 다 내가 샀어. 식모살이 해서. 그 때 예산서 식모살이 하면서 한 달에 300원 줬거든. 돈 안 주면 다 부수고 때리는겨. 장사 허는데 멍 지구 그러면 거짓말 허는겨. 부딪히고 넘어졌다고. 돈을 달라고 해서 살 수 가 읎어. 그게 제일 어려워. 일 않지. 그냥 놔두기만 허면 실컷 살어. 시계같은 것두 잽히고 술 먹으려고 그러는디 내가 남편 생각이 나겄슈? 시어머니 있어도 때려. 도치 같은 걸로 어깨를 찍어. 홍성을 걸어가는디 얼매나 눈물이 나던지 넘들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러나 그러는 이들도 있었어. 이 세상에서 필요한 일을 해야 하는디 필요한 일을 안 허니 빨리 데려간거야. 92년도에 돌아가셨어.

예순 살 넘어서는 사진 찍은 거 있는디 그 전 에는 사진 하나 읎어. 애들도 읎는디 뭐. 그나마 막내는 일곱 살 인가 해서 하나 찍은 거 있어서 지가 가져갔어. 아쉰거 읎어. 이제 죽을텐디 뭣허러 찍어.

 
어렵게 살았던 시절, 사진 한 장 찍을 여유가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이제 죽을텐데 뭣하러 찍냐”고 하십니다. 그래서 원 없이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사진 속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옛날 고생 모두 잊고 편해 보입니다. 다만 몸이 불편하고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 행복한 노후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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