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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국제 영화제가 지속되려면

소설, 시, 연극은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영화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말처럼 탄생부터 발전과정까지를 모두 지켜볼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이다.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 조그만 극장에서 33명의 관객을 놓고 영화를 상영했던 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발명가 에디슨도 한해 전에 접안렌즈를 통해 나무상자처럼 생긴 내부에서 재생되는 이미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장비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만들었다. 그러나 혼자만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영화의 발명자는 되지 못했다. 그에 비해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는 스크린에 이미지를 투사해 관객들이 함께 볼 수 있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이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의 발명자가 된 이유다. 그러나 ‘에디슨의 저주’라고 할까, 요즘은 IPTV, VOD, 핸드폰 등을 이용해 영화관에 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영상콘텐츠들을 즐길 수 있다. 지금은 뤼미에르식 보다 에디슨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는 기술의 발전, 사회 변화와 함께 했다. 영화가 발명될 때인 19세기는 변화의 시기였다. 증기기관차(1829), 전화기(1876), 축음기(1877), 백열전구(1879) 등의 발명이 있었고, 파리에서는 1889년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에펠탑이 세워졌다. 파리에는 벤야민이 ‘상품 자본의 궁전’이라고 불렀던 ‘아케이드(arcade)’가 만들어졌고, 시골 사람들은 파리에 올라와 변화무쌍한 도시 풍경에 어리둥절해 했다. 벤야민이 보기에 시골 사람들이 도시를 바라보는 모습은 도시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영화는 도시에서 만들어진 근대성의 산물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속에 나타난 기차의 달려오는 모습에 사람은 경악해 소리를 질렀고, 오늘날 우리는 핸드폰과 AI등과 같은 과학, 기술의 발전에 놀라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사람들의 생활관습도 바뀌고 있다. 시, 소설보다는 영화를 가까이하는 영상의 시대가 됐다. 요즘 방탄소년단들의 홍보가 공연보다는 영상을 통해 이뤄졌음은 이 시대를 통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영국 전설의 록 밴드 ‘퀸’을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국보다도 한국에서 먼저 흥행에 성공했고, 한국영화 ‘완벽한 타인’도 흥행성공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흥행에서 성공한 영화는 사회에 끼치는 영향도 대단하다. 1970년대 중반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이 영화화 됐을 때, 주인공들의 대사(臺詞)(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를 따라해 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서울 어느 다방에서는 에어컨을 틀어 놓았다는 상황을 ‘경아(여주인공)가 얼어 죽었음’이라고 영화로 빗대어 알리기도 했다. 고전영화가 된 ‘카사블랑카’가 상영되고 났을 때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주인공의 건배하는 모습을 따라 하기도 했다. 이런 영화들이 좋은 영화인지, 나쁜 영화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흥행에 성공했다고 해서 소위 명화의 반열에 드는 것도 아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도 허술한 구성이 눈에 띄며 ‘카사블랑카’는 ‘키츠(kitsch)’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있기도 하다. 좋은 영화는 대중성뿐만 아니라 예술성이 동반돼야 한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는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봉준호, 박찬욱 감독이 만든 영화들은 완성도도 높을 뿐 아니라 천만관객을 동원했다. 요즘은 외국 영화보다 한국 영화들이 오히려 관객을 더 많이 끌어 들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영화가 위기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의 뒤를 이를 젊은 감독들이 아직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훌륭한 감독들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 저변이 확대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일환으로 많은 단편 영화제가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영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혁신들이 단편영화에서 시도돼야 한다.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근본적으로 새로움의 추구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가 시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고 정의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기존 감독들을 그대로 따라 해서는 영화의 발전 가능성은 없다. 단편영화제는 영화의 흥행이 아니라 영화장이들의 다양한 실험장이 돼야 한다. 영화는 대도시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됐지만, 컴퓨터, 핸드폰의 등장으로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그런 의미에서 축산단지 홍성에서 국제 영화제를 개최했다는 것은 경이롭고 박수 받을만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단편 영화제 중에서 성공한 단편 영화제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먼저 지역민들이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제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처음 열리는 국제 단편영화제를 놓고 관객의 많고 적음, 주민들의 반응, 출품된 영화의 수준, 홍보방법 등으로 설왕설래할 수 있다. 영화제는 경제 효과, 관광효과, 관객의 수만으로 평가해서 성공할 수 없다. 상업자본이 배제된 상황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실험해 출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실험성 짙은 영화를 보기위해 먼 곳에서 많은 관객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지역민들이 영화를 사랑하고, 지역의 젊은이들이 단편 영화를 만들어 출품하고, 이 국제 단편 영화제를 축제로 생각해야 한다. 축제는 지역민들이 자주 모여 소통하고 궁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짧은 준비기간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러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어려운 재정환경 속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관계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번에 상을 받은 영화들과 출품작들은 대체로 작품성이 높다. 뤼미에르 형제도 33명의 관객을 놓고 영화를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경찰이 나서서 관객의 줄을 세워야 했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 문구를 떠올리며 내년에는 더욱 알차고 발전된 모습의 홍성 국제영화제를 만나고 싶다.

김상구 <청운대 대학원장·칼럼위원>

김상구 칼럼위원  sangkoo@chungwo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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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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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호 2018-11-22 15:36:41

    영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을 어찌 글로 다할 수 있을까요. 단지 홍보를 조금만 더 했으면 하는 아쉬움만이... 늘 다양한글로 마음을 살찌우는 님께 감사의 글을 몇자 올려본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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