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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풍경(風磬)

몇 년 전 갤러리에서 우연히 산 풍경(風磬)이 하나 있습니다. 그림이 아니고 테라스에 매달려 바람 따라 흔들려 우는 풍경입니다. 풍경을 실내에 걸어 두고 싶어 못 박는 것도 어렵고, 마땅히 걸어 둘 자리도 없어 망설이다 달력 위에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달에 한 번, 달력을 넘길 때마다 손의 흔들림 따라 소리를 내었습니다. 바람 부는 크기와 움직임에 따라, 풍경 소리는 듣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른 음폭의 느낌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풍경이 실내에 들어오면서 공간이 아닌 달력에 기대 있으니 산사의 풍경 소리가 날 이유가 없습니다. 놓여야 할 자리에 놓이지 못한 까닭이지요.

모든 사물에는 어울림이 있습니다. 어울림이란 것이 크게 욕심 내지 않는다면 그 사물 자체로 빛이 나게 하는 것입니다. 풍경은 바람이 지나는 길에 놓아 줘야 제 모습 그대로 빛이 돼 소리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선택에 따라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걸 수 있는 준비를 했습니다. 세상이 아닌 자연을 볼 수 있는 위치에 매달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답답했던 가슴을 향해 맞바람 치도록 창문도 열어 놓았습니다. 서재 방까지 들려오는 풍경 소리가 제법 좋습니다. 바람에 잘 어울립니다. 난간으로 옮겨진 풍경을 보면서 풍경의 주인은 내가 아닌 바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를 오랜만에 뵈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마를 보면 삶의 고독이 묻어 있지만 멋이 있습니다. 주름사이에 ‘팔베개하고 새우잠 자도 남한테 손 안 벌리고 살면 최고다’라는 신념은 여전하십니다. 80평생 자신의 유혹과 싸워 이겨낸 풍경의 언어입니다. 본성 그대로, 삶의 모습 그대로 전해 주는 아버지만의 풍경소리는 공자의 노래보다도 활기찹니다. 가곡 중에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랫말을 음미하면 산사의 편안함과 고요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세상사 다 잊고 풍경 소리만 들릴 것도 같습니다. 주승에게는 잠의 안식을 줄 만큼 편안한 소리, 객에게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근심을 떨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풍경입니다. 요즘같이 잡음에 노출돼 있는 도시를 떠나고 싶을 때 생각나는 가사입니다. 가끔 이것저것 떠나서 그런 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잘 아는 산사는 없지만 인연이 닿는다면 한 번쯤 그런 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일상의 풍경 속에서 그윽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사람 사는 모습을 좀 더 아름답게 채색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소리로 재현할 수는 없지만 중년의 언덕에서 풍경 하나 걸어 봅니다.

풍경은 공간을 비워 놓을 때 바람을 안아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소리는 공간을 통해 자기 밖으로 나가는 순수한 외출입니다. 소리는 공간이 자기와 맺는 관계로서의 탈 자아입니다. 소리의 탈출, 공간을 벗어남은 내 마음에 귀 기울여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분노함에 서두르지 말며, 비난함에 조급하지 말며, 질책함에 욕심내지 말자고 내면에 잠든 사유를 두드려 깨우는 소리입니다. 가을날에 바바리 깃과 잘 어울리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을을 충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마주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벌레 먹은 사과 한 개의 상처라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름을 견디어온 눈빛 끝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삶의 고난(苦難)도 평온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풍경소리를 제대로 듣는 사람입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생의 온기를 느끼며 어느 일순간 웃음이 절로 다가오면 큰소리로 ‘하하하’ 웃을 줄 아는 사람, 아무런 목적이 없는 말에도 미소와 끄덕임으로 익숙한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 편안한 풍경으로 자신의 공간에 제 몸 흔들어 울려주는 풍경이 아니더라도, 비록 삶의 평행선에 서 있지 못한다 해도 캔버스에 내 삶을 자유롭게 스케치하고 싶습니다. 데카르트적 성찰이 아니더라도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고향집 대문 끝에 문득 풍경 하나 달고 싶습니다.

유선자 <수필가·칼럼위원>

유선자 칼럼위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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