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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지 않은 이 벗하지 말고 잘못 고치는 일 용감해라논어 아카데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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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말했다. “군자가 중후(重厚)하지 못하면 위엄(威嚴)이 없어서, 학(學)을 익히더라도 견고하지 못해서 도리를 알지 못한다. 충신한 이를 가까이 하라. 충신이 나보다 못한 자를 벗하지 말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장은 도(道)를 체득한 군자(君子)의 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핀 것이다. 군자는 학업을 마친 뒤 정치계에 나아가 나라 일을 맡는다. 따라서 이 장을 읽으면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과 도리에 대해 알게 된다.

우선 중후함(重) 있어야 한다. 장중(莊重)함이 있어야 백성들이 믿고 따른다. ‘중(重)’은 돈중(敦重)함이니 돈후(敦厚)하고 장중(莊重)한 모양을 말한다. 용모는 단정 엄숙하고 마음에는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추(錘)’가 있어야 한다. 서경에 ‘완물상지(玩物喪志)’이라는 말이 있다. 주나라 무왕 때 서역에서 진귀한 개를 한 마리 보내 왔는데 왕(武王)이 거기에 정신이 쏠려 정사를 게을리 했다. 그러자 신하인 소공(召公)이 무왕을 훈계했다고 한다. 쓸 데 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 정신이 쏠려 소중한 자기의 의지를 잃는다는 뜻인데 전(轉)하여 권세와 명예 혹은 물질에만 너무 집착하면 마음의 빈곤을 가져와 본심을 잃게 된다는 뜻으로 널리 애용된 다. 마음속에 균형(正義. fairnaess)을 잡아주는 ‘추’ 같은 것이 있으면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유혹해도 쉽게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 용모가 단정하고 엄숙하면 백성들이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런 다음 절차적 정의(敬)에 따라 정책을 시행하게 되면 그 혜택이 모든 이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사람을 쓸 때 충신(忠信)한 자를 가려서 쓰면 백성들이 믿고 따른다. 이것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使民之道)다. 지도자라면 모르지기 이런 마음과 용태를 갖춰야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이가 더 많은 것 같다. 누가 뭐라 하면 쏜살 같이 반응한다. 반응하는 속도가 초고속 인터넷의 속도를 능가한다. 그래서 본심은 쉽게 드러나고 위엄은 찾아볼 데가 없다. 장중함을 잃게 되면 통치 능력을 의심한다. 정치가 안정될 리 없다.

다음은 학즉불고(學則不固)이다. 중후한 용모와 굳은 마음이 없으면 학업을 쌓아도 견고함이 없다. 쓸 데 없는 지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학(學)은 ‘배운다’는 뜻이고 즉(則)은 ‘∼하면’이라는 뜻이다. 배우면 ‘즉’ 다음 이어지는 내용(不固)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무난할 것이다. ‘고(固)’ 자는 무언가를 에워싸고 있는 囗와 ‘옛 것’을 뜻하는 ‘古’가 합쳐진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지던 것을 ‘전해지는 그대로 단단히 굳게 지킨다’는 뜻이다. 전하여 ‘굳다’ ‘완고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다가 ‘융통성이 없다’ ‘고루하다’는 뜻으로 어의가 확대됐다. ‘고’에 대해 주희(朱熹)는 ‘견고함(固)’이라 해석했고 공영달(孔穎達)은 ‘가림(蔽)’이라 해석했다. 주희에 의하면 마음에 균형을 잡아주는 ‘추’가 없는 자는 품은 뜻이 견고하지 못해 ‘완물상지’하게 된다. 외모에서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배우는 일도 또 배운 것도 견고하지 못하다. 이에 대해 공영달은 뜻이 견고하지 못한 자는 배운 것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학업을 쌓아도 배운 바의 지식에 가리어 균형 잡힌 정치를 수행하기 어렵다. 선왕(先王)의 도(道)를 일러줘도 펼치기 어렵다. 주희가 살던 시대에는 유학을 인격 수양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그래서 ‘견고함’으로 해석했다. 이에 대해 공영달이 살던 시대에는 유학을 정치술(儒術) 혹은 전장제도의 측면에서 활용했다. 그해서 ‘가림’이란 뜻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든 본지는 하나다. 군자 된 자는 품은 뜻(立志)이 견고하고 확실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를 하더라도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이에 대해 균형을 잡아주는 ‘추’가 없으면 아무리 질 좋은 교육을 받아도 그것을 온건히 지킬 수 없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없다. 외모에서 장엄함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믿고 따르지 않는다. 선거철만 되면 세력을 쫓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겉모양에서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 속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장중하고 위엄 있는 자태는 충실한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음은 ‘주충신(主忠信)’해야 한다는 것이다. ‘충(忠)’은 옳은 일에 모든 것을 바친다는 뜻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 아니라 ‘옳은 일’ ‘공평무사한 일’ 확장하면 ‘인간다움’ ‘인간의 도리’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일’에 자신을 바친다는 뜻이다. ‘신(信)’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양심(良心) 혹은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의 상태를 뜻한다. 이를테면 ‘참된’ 것이다. 사실 ‘참됨’을 뜻하는 ‘성(誠)’이라는 글자도 입에서 나온 말(言)이 말한 대로 이뤄진(成) 상태를 의미하니 ‘신’과 같은 뜻을 지녔다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된 말 중에 열매를 뜻하는 ‘실(實)’ 자가 있다. 말이 이뤄졌다면 결과 또한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실’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신’, ‘성’에서 파생된 글자다. 여기서 나온 글자가 ‘성신(誠信)’ ‘성실(誠實)’ ‘신실(信實)’이다. 주역에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이라는 말이 있다.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붙이를 자를 만하고, 하나 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그 냄새가 난초의 향과 같더라’라는 뜻이다. 서로 간에 ‘충’과 ‘신’을 다하는 벗의 우정을 빗댄 말인데, 문구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금란(金蘭)이라 일컫기도 한다.

한편 주충신의 주(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주장한다(主)’는 뜻으로 해석하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가까이 한다(親)’는 뜻으로 해석하는 설이다. 어의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나 실제에 들어가면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한다. 전자의 뜻으로 읽으면 ‘마음의 추요(樞要)로서의 충신(忠信)을 주장한다’는 뜻이 되지만 후자의 뜻으로 읽으면 충신한 사람을 ‘가까이 한다’는 뜻이 된다. 주충신 다음에 ‘나와 같지 않은 자를 벗하지 말라(無友不如己者)’는 문구가 있는 것에서 추론하면 후자가 타당할 듯 하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충신함이 있는 사람이라야 충신함이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벗으로 삼아 곁에 두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 충신함을 함양하는 데 힘을 써서 충신함을 기르고, 자신에게 있는 충신함에 비춰 충신함이 있는 이를 가려 사귀어서 곁에 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무난할 것이다. 제7장에 현현역색(賢賢易色)이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色)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 모든 것을 주고 싶어진다. 그렇게 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 어진 사람을 대할 때는 이런 자세로 임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易色) 그를 얻기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주겠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충신함을 배양할 때도 이러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조신(操身)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혹 나보다 더 충신한 이가 있다면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맞이하듯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주충신의 취지다. 지난 정부의 장관들 중에는 유독 상처 있는 자들이 많았다. 상처가 없으면 공직에 출마하기 힘들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아마 그것은 최고 지도자가 그런 자들을 선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시행한 정책이 충신(忠信)에 위배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정부가 눈여겨봐야 할 경계(警戒)가 아닐까 한다.

다음은 ‘나와 같지 않은 자를 벗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의 의미가 ‘충신함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인편에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허물은 각기 그 류(類)대로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허물을 보면 그가 군자(仁)에 속하는 사람인지 혹은 소인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벗을 사귀는 이유는 나의 ‘인간다움’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런데 충신함이 나보다 못한 자를 사귀게 되면 유익함은 없고 해로움만 있을 뿐이다. 정당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다. 그런데 개중(個中)에는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하면 분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신임을 얻는 데 유익함은 없고 해로움만 있을 뿐이다. 정당을 만들 때에도 내면의 충신함과 외면의 장중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물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의 지도자가 되어 자신의 허물을 다스는 일에 용감하지 않으면 그 허물이 날로 자라 급기야는 나 아닌 내가 나를 지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배우는 이유는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알고, 그른 것을 고쳐 옳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중에 옛 모습과 현재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더러 있다.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게으름을 피웠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속히 고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래의 어느 날 괴물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 월식(月蝕)과 같아서 백성들이 눈을 치켜뜨고 바라본다. 그러나 그것을 고치는 데 용감하면 만인이 우러러보고 존경한다. 군자는 뜻이 견고하고 용태가 장중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믿고 따른다. 뜻은 인간다움(仁)을 지향해야 하고 처신에는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 절차적 정의(敬)를 준수하고, 옳은 것을 보면 반드시 이루려고 해야 한다. 이에 대해 옳지 못한 것에는 강력하게 저항해야 한다. 벗을 사귈 때에는 나보다 충신함이 나은지를 살펴야 한다. 충신함이 나보다 못한 이는 결단코 멀리 해야 한다. 또 허물이 있으면 다스리는 일에 용감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믿고 따른다. 이것이 학이편 제8장의 요지다.

<이 강좌는 홍성문화원과 함께 합니다.>

손세제 철학박사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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