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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문턱에서

사흘이 멀다 하고 비가 내린다. 빗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한결 짙어졌다. 막연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기다렸다는 듯이 눈도 내릴 것이다. 함박눈이 오면 강추위가 한 발 물러날 테고, 눈발이 성기면 매서운 추위가 밀어닥치리라. 눈이 장설로 쌓인 깊은 산골, 봉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한숨짓는 이름 모를 노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산 퇴깽이, 노루, 고라니덜은 이 눈 속에서 뭘 먹구 산댜? 쯧쯧!”

예전에는 살날이 얼마 안 남았을망정 미물들에게까지 신경을 쓰던 노인들이 흔했다. 때가 되면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러다 끼니를 대접하던 사람들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서가 아니었다. 사람의 도리가 그래야 한다고 느꼈기에 아무런 대가 없이 그랬다. 요즘은 어떤가. 살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어제도 오늘도 갖가지 형태에 열광하며 소모적인 삶에 젊음을 불태운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 계속 소리치고, 환호작약하며 밤을 지새우고 지축을 뒤흔든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람답게, 옹골차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자그마한 행복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일은 도처에서 벌어진다. 지구 저 편 아르헨티나에서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G20 소속 국가의 정상들이 모여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그것도 필요악일지는 몰라도 기분이 쓸쓸하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는 진보하고 있는가?

오늘로써 글쓰기 수업의 체험학습을 위한 일일 여행은 마지막이 될 듯하다. 상오 11시 남짓에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 이씨 왕조의 경사스러운 터전이 된 경기전(慶基殿)에 먼저 들르기로 한다. 이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살던 유적지요, 오목대는 이태조가 홍건적을 격파하고 수도 개경으로 가던 중 집안 일가들과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였던 곳이다. 한 편 머릿속에서는 요즘 조석으로 떠들고 있는 사법부 관련 문제들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힘없는 백성들이 법조문을 몰라 못된 아전배들이나 지역의 목민관들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과 같은 조선의 교도행정의 일단만 봐도 알 수 있다. 죄수들을 괴롭히는 각종 형벌, 형구는 말할 것도 없고, 돈이 없는 죄수는 감옥에 들어가도 감방의 연장자요 최고참인 속칭 마왕과 그 밑의 영좌, 공원, 장무 등이 휘두르는 온갖 폭거에 삶을 부지하기조차 힘이 든다. 이른바 오례(五禮)라는 것이 있어 신참 죄수는 감옥 문설주를 넘어설 때, 감방 안으로 들어설 때, 목에 쓴 커다란 나무칼을 벗으면서, 앉은 자리를 배정받으며, 여러 날 지난 뒤 감방의 한 식구로 인정받으며, 그때마다 돈을 내야만 했다. 허나 가진 돈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죄수는 일정기간 동안 밥도 절반은 뺏기었고 밤에는 강제로 마왕의 남색 상대가 되야만 했다. 돈냥이나 있는 죄수는 깔개값, 초변값(처음 대소변 보는 값), 신유값, 계간값(남색 상대에서 벗어나려면) 따위를 바쳐야만 됐다. 의복이나 사식을 넣을 때도 감방 안의 지배자들이 먼저 먹고, 돌려 입은 다음에야 자기 차례가 됐고, 돈과 줄이 있는 죄수들은 온갖 특권을 누리며 거들먹거렸다. 죄수들의 인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아진 게 없다. 미국 NASA에서는 화성탐사선 ‘인사이트’가 화성에 무사히 착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권문제에 있어 미국은 자유로운가? 자랑 할 만한가? 아니 남의 나라 얘기를 할 것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중요한 사건사고는 인간존중의 바탕에서 따져볼 때 수긍이 갈만한 일인가? 나는 오목대 건너편의 담벼락에 그려진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그림을 보며 환호하는 학생들 뒤편에 서서 또 다른 상념에 빠진다. 여행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만끽하면서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나갔다.

‘나는 왜 사는가?’

이원기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이원기 칼럼위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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