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마면 3·1운동, 철마산 중심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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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면 3·1운동, 철마산 중심 전개
  • 김옥선 기자
  • 승인 2019.01.1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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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슈-3·1독립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금마면 죽림리에 있는 3·1운동 기념비.

연극 흥행장서 독립만세… 177명 수십대 태형 받아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탈당한 우리 민족의 주권과 생존권을 되찾고자 전개된 민족독립운동이었다. 홍성지역의 3·1운동은 홍주문화권의 사상적 배경으로 의병 활동과 근대적 교육활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 의식이 형성돼 3·1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곳 중 하나다. 홍성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7일 홍성 읍내 장터에서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월 9일 은하면 장곡리 독립만세운동까지 30여 일간에 걸쳐 진행됐다.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김진호 연구원의 ‘홍성지역의 3·1운동’에 따르면 독립만세운동 현장에서 순국한 인사가 1명, 일제의 고문과 태형으로 순국한 인사가 3명, 재판에 회부돼 태형이나 옥고를 겪은 인사가 39명이다. 더불어 일제는 4월 7일부터 홍동면과 금마면의 인사들에게 집중적으로 태형을 가해 독립만세운동의 의지를 꺾었다. 일제는 초기의 태형에서 60도가 있었으나 주로 30도로 행했고, 4월 14일부터는 최고형인 90도까지 태형을 가했다.

김진호 연구원은 “홍성지역의 3·1운동은 농민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의 지역민이 적극적인 참여로 추진된 독립운동이다”라며 “2~30대 청년층의 활발한 활동과 다양한 형태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금마면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故박의성(왼쪽)과 故최중삼.

홍성군 금마면은 금마면의 재야인사인 민영갑과 이재만이 협의해 4월 1일 밤 금마면 가산리에서 연극이 있음을 알고 이원교의 집에 모여 김재홍, 최중삼, 조재학, 조한원, 김종석 일행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연극 흥행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협의했다. 이날 밤 8시 경 연극이 무르익었을 때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해 관람객 30여 명이 동조하고 열창을 했다. 이에 왜경이 출동, 강제 해산시켰다. 다음날 이재만, 민영갑, 최중삼, 김재홍, 조재학, 조한원, 김종석 등 7명은 왜경의 감시와 추격을 받으면서도 각 마을에 잠입해 의거 계획을 주지 선동했다.

4월 4일 금마면 철마산을 거점으로 부평리, 원당산, 송암리 퇴뫼산 등 면내 각 산 정상에서 수 백 명 군중들의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진행됐다. 횃불만세운동에 가담한 7명을 포함해 177명은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수 십대의 태형을 받았다.

금마면3·1만세운동독립유족회 최숙자 회장은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두루마기 안에 솜방망이를 만들어 숨겨가지고  모였다고 한다”며 “횃불만세운동이 끝난 후 사방으로 흩어져 산 아래로 내려와 경찰을 분산시켰고 낮에는 숨어 있다가 저녁에는 사랑방에 모여 글을 읽고 있는 선비들을 불러 ‘글을 읽어서는 해방을 맞이할 수 없으니 만세를 불러야 한다’며 선비들도 만세운동에 동참시켰다고 한다”고 회상했다. 이어 “저희 아버지인 최중삼은 왜경들에게 ‘이놈들 너희들이 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내가 만세를 안 부를 것 같냐, 독립이 될 때까지 만세를 부르겠다’고 하셔서 감옥에 한 달을 더 있다가 나오셨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에 따르면 이외에도 양기환, 양두환 형제가 있었는데 형님이 만세를 부르고 나서 매를 맞으러 가는 형님을 생각하면서 밤새 통곡을 하다가 나도 만세를 불렀으니 잡아가라며 같이 붙잡혀 가 태형을 맞았다고 한다. 최 회장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2년 동안 적금을 들어 증손자들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는 연금을 받아 장학 사업을 하고 있다”며 “아버지의 유산을 알차게 사용하고 싶어서 시작하게 됐는데 이 시대에 남아 후손들에게 장학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존에 30도, 60도의 태형을 받은 분들이 서훈 신청을 받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고 밝혔다.

금마면 월암리에 거주하는 박유양 씨는 “아버지 박의성이 태형을 받고 나서 죽었다고 생각해 장사를 준비했는데 살아 돌아오셨다”라며 “마을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이 그 당시 모두 15명이었는데 마을에서 개 한 마리를 잡아 태형을 맞고 온 사람들에게 나눠 먹였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금마면3·1만세운동독립유족회 최숙자 회장(사진 왼쪽)과 박유양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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