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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지역 3·1운동의 성격과 의미기획이슈-3·1독립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갈산면 상촌리에 세워진 호명학교 자리에 설립된 갈산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뒤쪽 건물이 호명학교로 추정된다.

본격적 항일의식 표출 홍주의병부터… 구국운동의 초석
2~30대 다양한 연령층 참여… 10일간 집중적으로 전개


1910년대 대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한 국제 정세의 변화는 우리나라 민족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하며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내적으로 일제의 탄압 하에서 이념적 대립을 보였던 의병의 무장투쟁론과 애국계몽가의 실력양성론이 상호보완적으로 통합되면서 독립운동의 역량과 저변이 확대됐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고종의 갑작스러운 훙어는 전 민족적 항일독립운동 의식의 발현에 도화선이 됐고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3·1운동의 배경은 일제의 침략과 잔혹한 식민지 직접 체제로 인한 민족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독립의식이다. 또한 3·1운동의 지방 확산은 서울 3·1운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지만 각 지방의 3·1운동은 지역적으로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홍성지역의 본격적 항일의식의 표출은 홍주의병에서부터다. 1896년 1월 21일 100여 명의 홍주 일대 유생들이 이인영의 집에서 향회를 실시하고 군사 활동을 결의하면서 구체화됐다. 홍주의병은 적극적인 반제국 투쟁으로 유생층을 비롯한 농민층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1906년 홍주성 전투 등 항일운동의 기반을 제공했다. 또한 을사조약 체결 반대 상소로 경무국에 수감됐던 이 설과 김복한이 석방되고 이 설이 안병찬과 민종식에게 의병 봉기 서신을 보내면서 1906년 홍주의병이 시작됐다.

홍주의병은 지역민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이후 구국운동의 초석이 됐다. 이 설의 제자인 이길성은 구항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길성은 고등법원 상고 이유에서 “자기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한 뜻에 발동한 것이므로 1·2심에 불복하며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1917년에 만들어진 갈산공립보통학교의 변천과정을 적어놓은 연혁지로 갈산공보의 전신인 호명학교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김진호 연구원의 홍성지역 3·1운동에 따르면 금마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영갑, 이재만, 김재홍은 직업이 잡화상이나 농업으로 되어 있지만 고등법원 상고 취의서를 살펴보면 유학자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민영갑은 “국가는 백성으로서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국가를 근본으로 삼으며 충의는 국가의 강령이며 국민의 병이(秉彝)로 만국에 통하는 상식”이라 했으며, 이재만은 “충효열(忠孝烈)이 국가의 제1로 숭상할 것이며 만고에 불역지리(不易之理)라 하고 정치에 인(仁)과 폭(暴)이 있으며 예부터 인으로서 정치를 하면 국가가 흥하는데 어찌 강폭으로 정치를 하려 하는가”라고 주장했다. 김재홍은 “법 집행은 온 국민을 다스리는데 동일해야 하며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은 법 집행에 있는 까닭에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도가 스스로 있게 된다”고 했다.

김진호 연구원은 홍성지역 3·1운동의 성격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홍성지역 3·1독립만세운동은 서울 3·1운동의 영향과 인접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전개됐다. 박세화가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전하고 독립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보여줘 광천에서 독립 유인물을 부착하고 배포하면서 시작된 운동이 전개된 시기가 4월 1일 이후인 점과 충남지방의 3·1독립만세운동이 4월 1일을 전후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점을 고려할 때 그 외의 지역과 다른 일시의 독립만세운동은 인접지역의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둘째,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특히 농민들의 주도적인 참여로 전개된 독립운동이었다. 농민 외에도 광부, 무직자, 잡화상이나 양화점 등에 종사하는 인사들도 직업의 귀천이나 신분을 의식하지 않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셋째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연령층이 2~30대였다. 특히 장곡면과 금마면은 30대가 중심이 되어 전개됐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다. 넷째, 다양한 형태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유인물 배부, 횃불만세운동, 시장이나 연극 공연장 등 다수 군중이 집합하는 장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진행됐다. 다섯째, 평화적 시위 형태도 전개됐다. 독립만세운동 기간 동안 총 20개 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가운데 4월 7일 장곡면의 독립만세운동을 제외하면 일제에 대해 어떠한 폭력적 위협을 가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여섯째, 4월 1일부터 9일까지 10일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일곱째, 면내 거의 모든 마을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여덟째, 일경에 의해 체포 구금된 인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갈산면에서는 4월 8일 고도면에서 갈산공립보통학교 학생 60여명이 참여해 교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 갈산공립보통학교는 호명학교의 후신으로 1917년에 갈산보통학교로 개교됐다. 3·1독립만세운동 전개 당시 서울에 살던 김필진이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와서 갈산보통학교 학생이었던 김복진, 유철규, 김준규, 이동우 등과 병암산과 꾀꼬리봉에 올라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경찰에 의해 제지를 당하고 주동자 4명은 옥고를 치뤘다.

갈산초등학교 100년사 임태환 전 편집위원장은 “그 당시 유철규 씨는 모진 고문으로 장애까지 입었다고 하며 학생 50여명은 학교 뒷산으로 도망가 내갈리 꾀꼬리봉으로 올라가 만세를 부르다가 저녁에 하산하고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며 “이후 교사들이 가정을 방문해 등교를 권했으나 일본경찰의 감시 하에 일부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말한다. <끝>

김옥선 기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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