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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서포 김만중은 조선조 16대왕 인조 11년(1637)에 태어나 19대 왕 숙종 18년(1692)에 별세한 주요 관료요 정치가이자 대문호였다. 그가 남해에 유배됐을 때 홀어머니를 위로하고자 하룻밤 사이에 썼다는 국문소설 ‘구운몽’은 허균의 홍길동전, 작자미상의 춘향전과 더불어 우리 고전 소설의 삼대 걸작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당파싸움 속에서 세 차례 귀양살이를 하면서 틈틈이 써낸 서포만필 또한 고전 수필문학의 정수다. 이 작품이야말로 문인 김만중의 걸출한 면모는 물론이려니와 정치가요 경세가로서 그의 또 다른 모습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서포 김만중 하면 흔히들 문사로서의 면면부터 떠올릴 것이다. 그는 당대 제일의 문형, 즉 대제학이었다. 따라서 서포 김만중의 작품세계를 새로운 각도로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정치가요 고위관료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는 광산김씨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과 같은 익(翼)자 항렬인 김익훈은 서인 노론세력의 영수였고, 익훈의 아버지 신독재 김집은 서인 산당의 우두머리였으며, 김집의 부친은 조선 예학의 최고봉, 사계 김장생이 아니었던가! 가문의 이러한 배경 위에 서포에게는 또 다른 운명의 굴레가 씌워졌으니, 네 살 위인 형 서석 김만기의 딸이 동궁(세자)의 빈(嬪)으로 간택됐고 뒷날 동궁은 숙종으로 등극함으로써 김만기. 만중 형제는 붕당정치의 격랑 한복판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명분과 실리, 당리당략과 가문의 영욕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당파 싸움의 최선두에서 당료들을 이끌고 나라의 안위까지 살펴야만 했던 서포의 고단한 삶과, 수필 서포만필에 담겨있는 갖가지 인생사는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소설 구운몽은 주인공 양소유가 팔선녀들과 즐겁게 노닐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하늘나라로 간다는 이야기다. 이는 긴 세월동안 살벌하고 숨 막히는 정쟁의 한복판을 걸어오며 서포 자신이 온몸으로 체득한 인생철학이 변용된 것이리라! 구한말에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한국문학을 서구에 알리고자 고른 작품이 춘향전과 구운몽이었음을 볼 때 서구인들의 눈에도 구운몽은 재미있고 뛰어난 작품이었던 것이다. 서포는 나이든 어머니를 위해 이 소설을 국문으로 썼을 뿐만 아니라 주체의식을 가지고 한문을 모르는 수많은 서민들을 위해 우리글을 택함으로써 결국 국문학 발전에 획기적인 이바지를 했다. 이 점은 가장 고급스러운 어휘부터 가장 서민적인 언사까지 동원해 영문학의 깊이와 폭을 크게 신장시킨 셰익스피어의 공적이나 돈키호테로 스페인 문한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진 세르반테스의 업적에 비견될만한 쾌거다.

끝으로 하룻밤 만에 걸작을 써낸 기적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미국 연극의 아버지 유진 오닐은 걸작 느릅나무 밑의 욕망을 단 14일 만에 썼고, 장 콕토가 마약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 이주일 만에 쓴 소설 ‘무서운 아이들’ 역시 그의 여타 작품들보다 뛰어나다고 인정받는다. 예술작품의 수준은 겉으로 드러난 창작기간의 길고 짧음과는 무관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구운몽처럼 실제 집필 시간은 짧았을지라도 예술가 자신은 어떤 소재나 주제를 놓고 긴 세월동안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궁구해왔을지도 모른다. 혹은 예술창조의 순간에 완벽할 정도로 몰아의 상태에서 창작을 함으로써 기적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이런 기적은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드물게 목격되곤 한다. 공연이 끝난 뒤 기막힌 명연기를 보여준 장면에 대해 물어보면 “글쎄? 그 부분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서포 김만중이 명작 구운몽을 하룻밤 사이에 쓴 것이 사실이라면 남달랐던 그의 효심이 일궈낸 기적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청상이 되어 긴 세월 사활을 건 당쟁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밥 먹듯 했던 자식들의 안위 때문에 가슴이 숯이 되었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효심이 쌓이고 쌓여 어느 한 순간에 창작열이 대폭발한 결과가 아닐까 여겨진다.

이원기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이원기 칼럼위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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