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주는 그림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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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주는 그림의 힘
  • 김옥선 기자
  • 승인 2019.03.2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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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작가‘십자가’
<십자가> 1992년 작.

고등학교 미술시간이었다. 미술교사였던 강요배 선생은 학생들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라고 했다. 우리는 운동장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다. 일종의 낙서다.

고등학교 당시만 해도 그림에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다. 그저 심심풀이 삼아 끄적이던 수준이었다. 오히려 미술에 대한 관심보다는 미술교사에 대한 흑심이 더 컸다. 구부정한 어깨에 늘 뒷짐을 지고 온화한 미소와 더불어 고뇌에 찬 선생의 얼굴은 사춘기 소녀가 흠모하기에 충분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선생이 학교를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교조가 한창 만들어지던 때였다. 이후 선생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은 전시회였다.

강요배 작가는 교사이기 전에 화가였다. 197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2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6년 제주시 대호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77년부터 ‘관점’미술동인으로 활동하며 전시를 했다. 1981년 ‘현실과 발언’ 동인이 되면서 ‘도시와 시각’(1981), ‘행복의 모습’(1982), ‘6·25’(1984) 등의 동인전과 ‘젊은 의식’(1982), ‘시대정신’(1983) 등의 전시에도 참여했다.

<봄>33X23/1985년 작.

1988년 한겨레신문에 소설가 현기영의 ‘바람 타는 섬’ 삽화를 그리면서 제주 역사에 대해 공부하게 되고 제주 4·3항쟁에 대한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강 작가는 작가노트에 “그때에 이르러서야 나는 4·3을 생각했다. 알 수 없는 공포의 장막, 저 너머에 있는 내 고향 제주 그 섬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폭압적 살인 기제의 작동, 매몰 협박 감시에 의한 인멸과 봉인, 살아남은 사람들의 울분과 눈물, 그리고 침묵, 물론 나는 그것을 직접 겪지 않았다. 그 일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까. 그러나 또한 나는 그 일들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두렵고 어리석었으므로… 나약하고 무력한 내가 그 죽음들을 생각하고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이 절망에 빠진 나에게 작은 희망이 될 수도 있었나 보다”라고 썼다.  그리고 1992년 3월 ‘제주민중항쟁사-강요배의 역사그림전’을 선보였다. 역사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보며 이를 회화로 탄생시키는 작가의 힘이 느껴진다. 강요배 작가의 제주 4·3항쟁 연작그림으로 한국 사회에 제주 4·3항쟁의 실체를 바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강요배 작가는 제주의 자연 풍광을 그림면서 조금 다른 화풍을 선보였다.  이밖에도 ‘4·3 50주년 기념-동백꽃 지다’ 순회전(1998), ‘땅에 스민 시간’(2003) ‘풍화’(2011) 등의 전시를 열었다. 2015년 이중섭미술상을 받아 한국 미술사의 주요 작가로 인정받았다.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연히 전시장 주변을 배회하던 중 강요배 작가의 드로잉 전 포스터를 보게 됐다. 냉큼 전시장 문을 열었다. 이전 거대한 스케일의 작업은 아니지만 강 작가의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드로잉 작업들을 볼 수 있는 전시회였다.

드로잉은 작가의 또 다른 노력의 결과물이다.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드로잉은 부정할 수 없는 자기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의 궤적들이다”고 말한다. 작가와 화폭과의 끊임없는 전쟁이 충돌해 표현되어지는 것이 드로잉이다. 강요배 작가의 드로잉은 그것마저도 따스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제주의 자연에 대한 숭고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강요배 작가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것은 그림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위안’이 되는 것은 그림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강요배 작가를 교사로 만났던 것은 순전히 나의 행운이었다. 교사로서도 충분히 존경할 만한 작가였고, 회화가 무엇을 말해줘야 하는지를 작품으로 보여주고 가르쳤던 사람이었다. 이제 벌써 환갑을 넘어선 강 작가, 아니 강요배 선생이 문득 그리워지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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