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생가지 ‘공약삼장비’ 전국서 유일하게 세워
상태바
만해 한용운 생가지 ‘공약삼장비’ 전국서 유일하게 세워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4.21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3>

홍주출신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8. 29~1944. 6. 29)선사는 한국의 근현대사 인물 중 가장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깨달음의 길을 걸었던 수행자의 한사람이었으며, 격랑의 근대사를 온 몸으로 안고 살았던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또한 시대의 아픔과 진리의 열망을 언어로 노래했던 시인이었고, 한편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던 민족주의자요, 항일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66년 이라는 짧은 생 기간에 아로새겨진 만해 한용운 선사의 정신이며, 삶의 여정이다. 올해는 3·1독립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이다. 또한 만해 한용운 선사의 탄신 140년이자 열반 75주기를 맞는 뜻 깊은 해이다. 3·1독립운동 100주년과 만해 탄생 140년, 열반 75주기를 맞아 홍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역사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는 만해의 사상과 업적, 삶의 정신과 흔적을 찾아 5000여리(800~1200여㎞왕복)의 길을 따라가 본다. 만해가 살아온 삶의 자취 속에서 오늘의 지혜를 찾으려는 일반 국민은 물론 자라나는 학생과 청소년들에게 체험과 교육의 공간을 서로 공유할 수 있을지 등 만해 선양사업의 의미와 가능성, 실현방안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만해 생가지에 세워진 공약삼장비 비석의 앞면에는 공약삼장이 쓰여 있으며, 비석의 뒷면에는 ‘1910년 일제의 무력에 의한 한일합방이후 식민통치에 분노한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으로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여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당시 최남선 선생이 쓰신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이시며 우리고장 출신이신 만해 한용운선사께서 공약 삼장을 첨가하시어 민족운동을 크게 독려하신 바 그 유지를 기리고자 공약삼장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2001년 8월 14일 홍성군수 이상선 세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민족시인이자 승려이며,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사
결혼한 지 2년, 돌연 집을 떠나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생가지엔 만해사와 만해문학관, 민족시비공원 등 설립돼
공약삼장, 독립선언서의 눈동자 만해 사상·인격의 축약판


우리민족의 역사와 정신의 주역으로 지금까지도 홍주인의 가슴엔 물론 우리 민족의 가슴에 살아있는 시인이자 승려이며 독립운동가로 우리의 뇌리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만해 한용운 선사.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79년 8월 29일(고종 16년, 기묘 음력 7월 12일) 충청도 홍주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에서 이양공 한명진의 19세손인 충훈부도사 응준(韓應俊)과 온양 방씨(方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요, 호적에 기록된 이름은 정옥(貞玉)이며 불문에 들어가기 이전 속명은 유천(裕天)이라고 했다.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萬海)다. 만해의 조부(할아버지) 영우(永祐)는 훈율원 첨사, 증조부 광후(光厚)는 지중추부사를 역임했으며, 아버지 역시 충훈부 도사를 지낸 양반 계층이었지만 가세는 넉넉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해(萬海)가 부친을 따라 홍주면(지금의 홍성읍) 남문동으로 이사한 것은 7세 때(1886년경)의 일인데, 어려서부터 천재니, 천동이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만해는 일찍이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아마도 부친이 만해를 데리고 홍주 남문동으로 이사를 나온 것은 만해의 교육을 위해서 본가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만해는 아홉 살에 ‘기삼백주(朞三百註)’와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했으며,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유교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에 능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슨 책이고 한 번 읽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어 동네는 물론 주변에서도 화제가 됐다고 한다. 열네 살이 되던 1892년에 부모의 뜻에 따라 홍주면 학계리에 사는 전영주의 셋째 딸 정숙과 결혼했으나 결혼한 지 2년이 되는 열여섯 살에 돌연 집을 떠나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간다. 1903년 어느 날 부인이 산고(産苦)를 당하자 홍주장에 미역을 사러 나왔다가 그 길로 강원도 백담사로 향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태어난 첫아들이 보국(保國)이다. 만해는 왜 갓 결혼한 상황에서 그것도 첫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고향을 떠나 산 넘고 물 건너 그 먼 강원도의 설악산 백담사를 찾아갔을까? 어떠한 연유에서 입산(入山)을 결행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만해사상의 정수
충청도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땅은 예로부터 의인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고려 충신인 최 영 장군, 조선시대 사육신인 성삼문 선생, 항일 독립투사였던 백야 김좌진 장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두 ‘의(義)’라는 기개를 충직히 지켜온 인물들이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한국불교사와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만해 한용운도 이곳 홍주 땅에서 태어났다. 현재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는 만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에는 생가(기념물 제75호)가 복원돼 있다. 또한 만해사와 만해문학관, 민족시비공원 등이 설립돼 있다. 총 3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만해 문학체험관은 대지면적 2803㎡, 연건평 1090㎡ 규모의 2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지난 2007년 10월 개관했다. 전시실에는 만해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60여점의 유품과 작품을 비롯해 만해의 사상과 작품 세계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시청각 영상시설 등이 설치돼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만해의 사상과 체취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만해 생가지에서 눈에 띄는 것은 3·1독립선언 당시 만해가 직접 작성했다는 ‘공약삼장비(公約三章碑)’이다. 이 ‘공약삼장비문’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만해의 생가지에만 세워져 있다고 한다. 2001년 당시 이상선 전 홍성군수에 의해 제작돼 세워졌는데, 만해의 기백과 정신이 공약삼장에 그대로 배어 있다는 평가다. 만해 생가지에 공약삼장비문을 제작해 세운 이상선 전 홍성군수는 “1991년 당시 이병칠 전 군의회 의장 등 군의원, 신보규 기획실장 등 공무원들과 함께 청산리전적지를 처음으로 방문했다”며 “당시 홍성 고암리 출신의 박계동 연길시장 등을 만나 청산리전적지 첫 방문을 마치고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방문보고회를 가졌다”고 회고하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만해 선사의 공양삼장비를 꼭 제작해 세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돌아와 2001년 8월 광복절에 생가지에 공약삼장비문을 세웠다”고 밝혔다. 이 전 군수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세운 공약삼장비 일 것”이라며 “정의와 자유, 민족과 철저한 불교의 실천행을 강조한 만해 선사의 정신과 삶의 철학이 그대로 배여 있는 비문”이라고 말했다.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에 대해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지난 2004년 8월 5일부터 8일까지 백담사에서 열린 만해학 학술심포지엄에서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의 집필자에 관하여’란 논문을 통해 “공약삼장은 매우 간단·명료하지만 독립선언서의 ‘눈동자’일뿐 아니라 만해의 사상과 인격, 구도와 신념의 축약판”이라고 밝힌바 있다. 공약삼장의 자유·비폭력·국제주의 이념과 만해 사상을 비교 검토한 결과 “불교의 해탈, 불살생, 박애, 보편, 도덕주의 정신을 끝까지 지켜 온 만해가, 자유, 비폭력, 세계주의를 골자로 하는 공약삼장의 필자였다고 보는 편이 가장 타당하고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결국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에는 만해의 번민과 수양, 득도와 사색 등이 그대로 녹아있다는 주장이다.

■ 만해, 민족의 정신사와 역사의 주역
아무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만해가 그리워지는 건 그가 지조를 생명처럼 지키며 자기의 사리사욕 보다는 민족의 장래를 가슴으로 아파하며 실천한 한국 근대사의 한 거목(巨木)이란 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물질의 풍요보다는 정신의 알진 풍요가 더 필요한 시기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만해의 정열적 전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의 전반적인 굴곡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참담하다. 이러한 ‘참담한 역사의 한켠엔 고대의 원효와 근세의 만해 두 사람이 있었다’라고 시인인 고은은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에서 강조한 바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시인으로서의 만해, 승려로서의 만해,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를 생각할 때 분명 만해는 빈곤한 우리의 정신사와 역사에 있어서 주역이 되고도 남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나라의 냉정한 현실과 미래를 걱정해 볼 때 어느 한 ‘만해’라도 필요한 시기이며 또 그 부분들을 이해하기에 힘써야 할 때이다. 그것은 이 나라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시인으로서의 만해는 우리에게 그냥 시만 남겨두고 간 게 아니다. 만해가 말했듯 시가 비록 인생의 사치품이라는 만해다운 시론을 펼쳤지만 만해의 가슴에 오롯이 박힌 만해의 시는 만해답게 민중의식과 역사의식에 투철한 귀중한 단어들을 나열해 엮은 시를 남기곤 했다. 만해의 대표적인 시 ‘님의 침묵’은 전형적인 삶의 능동태를 절실하게 가슴으로 노래하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만해가 노래한 ‘님’은 무엇일까. 만해는 님의 분명한 뜻을 여러 의미로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리는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봄이 님이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그래서 만해가 노래한 님이 조국이 되는 것임엔 분명해 보인다. 시는 시로서 평가될 일이긴 하지만 만해는 시를 시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가슴 구석구석엔 조국에 대한 현실이 더 깊게 각인 되었으리라.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