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성장지, 홍주성 동쪽 성벽 오관리 21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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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성장지, 홍주성 동쪽 성벽 오관리 212번지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4.2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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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4>

홍주출신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8. 29~1944. 6. 29)선사는 한국의 근현대사 인물 중 가장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깨달음의 길을 걸었던 수행자였으며, 격랑의 근대사를 온 몸으로 안고 살았던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또한 시대의 아픔과 진리의 열망을 언어로 노래했던 시인이었고, 한편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던 민족주의자요, 항일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66년 이라는 짧은 생애에 아로새겨진 만해 한용운 선사의 정신이며, 삶의 여정이다. 올해는 3·1독립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이다. 또한 만해 한용운 선사의 탄신 140년이자 열반 75주기를 맞는 뜻 깊은 해이다. 3·1독립운동 100주년과 만해 탄생 140년, 열반 75주기를 맞아 홍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역사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는 만해의 사상과 업적, 삶의 정신과 흔적을 찾아 5000여리(800~1200여㎞왕복)의 길을 따라가 본다. 만해가 살아온 삶의 자취 속에서 오늘의 지혜를 찾으려는 일반 국민은 물론 자라나는 학생과 청소년들에게 체험과 교육의 공간을 서로 공유할 수 있을지 등 만해 선양사업의 의미와 가능성, 실현방안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만해 한용운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홍주성 동쪽 홍성읍 오관리 212번지 일대의 현재 모습.

한용운 일곱 살 때 결성 박철동에서 홍주면 남문동으로 이사
한용운의 집안, 몰락한 양반의 집안이 아니었다는 반증 주목
한용운은 홍주면 남문동에서 홍주면 학계리의 전정숙과 결혼
홍성군 홍주면 오관리 212번지에 살면서 아들 한보국 낳았다


한용운은 고종 16년 기묘(己卯)7월 12일(1879년 8월 29일), 이양공 한명진(夷襄公 韓明晋)의 19세손인 청주인 한응준(淸州人 韓應俊)과 온양인 방씨(溫陽人 方氏)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홍주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城谷理 縛鐵洞)에서 태어났다. 민적(民籍)에 기록된 이름은 정옥(貞玉)이며 불문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유천(裕天)이라고 했다. 한용운이 아버지를 따라 홍주면 남문동(洪州邑 南門洞)으로 이사한 것은 7세 때의 일인데 어려서부터 천재(天才)니 신동(神童)이니 하는 평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용운은 왜 결성의 박철동에서 홍주면 남문동으로 이사를 나온 것일까. 본래 결성의 박철동의 생가 주변은 한응준의 선산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한용운의 형인 한윤경의 손자인 한수만의 증언으로도 확인되는 사항이다. 한수만은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 한용운의 생가에서 태어나 52세까지 집을 지키며 살았다. 이후 1983년 광천으로 이사와 부인과 두 아들, 가족들이 함께 살았다. 광천고등학교 뒷담과 광천 천주교성당 사이 25평 크기의 단독주택이다.

■ 한용운, 홍주면 오관리 212번지에서 살았다
한응준은 둘째 아들인 한용운의 교육을 위해 1886년경 홍주면(현 홍성읍) 남문동으로 이사를 나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한응준이 홍주로 이사를 나온 배경에는 결성의 박철동으로 운둔하기 전부터 홍주에 본가 등 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이는 한수만의 증언과 호적등본 등을 살펴보면 한윤경과 자식들은 결성의 박철동에 남아 생활했고, 한응준은 본가가 있는 홍주면 남문동으로 이사를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근거는 이후 한용운의 아들인 한보국의 홍주에서의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한용운이 몰락한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일설에도 불구하고 결코 한용운의 집안이 몰락한 양반의 집안이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한 대목이어서 주목된다. 한용운은 홍주면 남문동에서 홍주면 학계리에 살던 전정숙과 결혼했고, 아내인 전정숙이 아들 보국을 회임중일 때 출가를 한다. 따라서 한응준이 아들인 한용운을 데리고 이사를 나와 살던 집에서 보국을 출산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한보국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한보국의 본적은 홍성군 홍주면 오관리 212번지다. 따라서 한용운과 첫 번째 부인 전정숙이 살았고 한보국이 태어난 곳도 홍주면 오관리 212번지이다. 한보국도 자신의 출생지를 홍성읍 오관리 212번지로 기록하고 있고, 한보국의 어머니인 전정숙이 사망한 주소도 홍성읍 오관리 212번지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한용운의 남문동 집은 홍성읍 관리 212번지인 것이다. 홍성읍 오관리 212번지는 홍주성 동쪽의 현재 홍주성벽 끝자락과 홍성농협오관지소부터 홍성축협과 상설시장 쪽 상가와 홍주성 성벽사이로 지금은 홍주성주차장으로 조성된 지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한용운의 아들인 한보국은 홍성읍 오관리 212번지에 살았고, 홍성공립보통학교 17회로 1927년에 졸업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홍성공립보통학교 17회 졸업생인 신봉철의 아들인 신동석(1929년생) 전 홍성여고 교장의 증언이나 같은 17회 졸업생인 이강세 전 홍성농민조합장의 아들인 이종민 현 옥암지구개발주민대책위원장의 증언, 또 이종민이 보관하고 있는 한보국과 부친인 이강세 등 동창생 친구 여섯 명이 남산공원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생생하게 증명되고 있다.

토지대장에 기록된 홍성읍 오관리 212번지의 소유권은 1913년 이종석이 소유하고 1916년 이기영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뒤 몇 차례 바뀐다. 하지만 한보국은 부친인 한용운이 살았던 집에서 계속해 이사를 하지 않고 살았으며, 어머니인 전정숙이 1946년 3월 18일 사망한 것으로 한보국이 신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증언이나 기록 등으로 볼 때 한보국이 중외일보홍성지국의 기자로 활동했고 동아일보홍성지국의 총무일을 했으며, 철물점을 한곳도 이 집(홍성읍 오관리 212번지)이거나 집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한용운의 아들인 한보국은 1944년 현재 홍성읍행정복지센터(홍성읍사무소)가 들어선 곳에 직접 집을 지었다. 한용운의 외아들인 한보국에 관한 사항은 다음번에 살펴보기로 한다.

■ 한보국이 지은 집, 전 홍성군수가 차지했다?

1927년 남산공원에서 앞줄 좌측 김영환 5대 국회의원, 앞줄 중앙 이강세 홍성군농민조합장, 둘째줄 좌측 만해 한용운의 외아들 한보국 홍성군건축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이종민 소장)

한보국이 벽돌을 쌓으며 직접 지어 살았던 집은 홍성읍 오관리 474의 3번지에 있었다. 지금의 홍성읍사무소가 들어선 자리로 읍사무소가 들어서기 이전에 한국담배인삼공사 홍성지점과 지금의 권룡타운 맞은편의 경성회관 사이다. 1970년 초부터 2년 5개월 동안 이 집에서 거주했던 홍주향토문화연구회 전병준 씨의 증언과 기록(홍주향토문화 25집)에 의하면 두 칸 정도 크기 방 3개, 3칸 크기 대청과 부엌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번지 등기부등본에는 22평 3홉 8작 목조 기와 주택이 등재돼 있다. 이 집은 전용갑 홍주고등학교 이사장이 박흥양으로부터 매입했으나 뒤늦게 전병준을 시켜 이전 등기를 했다. 전용갑 이사장은 당시 전병준에게 “이 집은 원래 한보국의 소유로 알고 있다”고 전해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왜 박흥양 소유로 등기 돼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박흥양은 1959년 1월부터 1960년 5월까지 홍성군수를 지낸 사람이다.

한보국이 집을 지은 집터인 오관리 474의 3번지 175평 대지는 한보국이 1944년(소화 19년) 8월 9일에 박창국으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등기부등본에 나와 있다. 이 토지는 1964년7월 6일 박흥양 전 군수가 한보국으로부터 매입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1964년은 한보국이 평양에서 환갑상을 받던 해였다. 실제 매입과 등기 이전 날자가 달랐던 것은 보통 있는 일이지만 1953년 국군의 추격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어떻게 공무원에게 집을 팔고 갔을지는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한용운의 종손 한수만은 “남의 재산관리를 맡은 사람들이 주인이 없어지자 부동산특별조치법 등을 이용해 자신의 것으로 돌려놨을 것”이라고 증언한바 있다. 이 토지와 집은 1970년 홍주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월곡학원으로 팔리고 최근에는 그 장소에 홍성읍사무소와 홍성군보건소가 신축됐다. 학교법인 월곡학원은 학교법인 신암학원으로 법인명칭과 이사장이 변경됐다.

현재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만해 한용운의 생가지에는 만해 체험관이 복원돼 있다. 2007년 10월 개관한 전시실에는 만해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60점의 유품과 작품을 비롯해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작품 세계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시청각 영상시설이 설치됐다. 세미나실과 창작실은 만해 한용운을 연구하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어린이 체험실은 흔적체험용 탁본, 영상시설, 300여권의 만해 관련 도서, 정보검색용 컴퓨터, 퀴즈코너 등을 설치하는 등 어린이들의 유익한 체험의 장으로 꾸며져 있다. 만해 문학체험관 위에는 생가지와 만해사, 민족시비공원 등이 복원돼 있다. 하지만 만해 한용운의 성장지인 홍성읍에는 만해 한용운과 관련된 곳에 아무 표지석이나 기념물 같은 것은 없다.

부친의 가르침과 시대적 상황이 만해 한용운을 세상으로 나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이 집을 나와 출가한 시기는 19세와 25세로 나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의 만해 한용운은 누구보다도 민중의 궁휼한 삶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고민하고 번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인생은 무엇인가, 밤낮 근근이 살다가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를 곱씹고 또 곱씹었을 것이다. ‘의’와 ‘충절’의 고장 홍주에서 출발한 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는 강원도와 서울, 부산, 경남 등으로 이어지지만 이번 취재에서는 서울과 부산, 경남을 거쳐 강원도로 이어져 탄생지인 홍주에서 끝을 맺으려 한다. 어떤 곳을 가던 만해 한용운을 통해 민족과 불교를 만나고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열어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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