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아내 전정숙, 1904년 ‘남 모르는 아들’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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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아내 전정숙, 1904년 ‘남 모르는 아들’ 낳았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5.0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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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5>

홍주출신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8. 29~1944. 6. 29)선사는 한국의 근현대사 인물 중 가장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깨달음의 길을 걸었던 수행자였으며, 격랑의 근대사를 온 몸으로 안고 살았던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또한 시대의 아픔과 진리의 열망을 언어로 노래했던 시인이었고, 한편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던 민족주의자요, 항일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66년 이라는 짧은 생애에 아로새겨진 만해 한용운 선사의 정신이며, 삶의 여정이다. 올해는 3·1독립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이다. 또한 만해 한용운 선사의 탄신 140년이자 열반 75주기를 맞는 뜻 깊은 해이다. 3·1독립운동 100주년과 만해 탄생 140년, 열반 75주기를 맞아 홍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역사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는 만해의 사상과 업적, 삶의 정신과 흔적을 찾아 5000여리(800~1200여㎞왕복)의 길을 따라가 본다. 만해가 살아온 삶의 자취 속에서 오늘의 지혜를 찾으려는 일반 국민은 물론 자라나는 학생과 청소년들에게 체험과 교육의 공간을 서로 공유할 수 있을지 등 만해 선양사업의 의미와 가능성, 실현방안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한보국과 딸, 손자들. 한보국이 사망하기 이전 평양에서 촬영했다.(한용운 연구 자료사진)

만해 한용운, 자신의 아들에 대해 자세히 말한 적 거의 없어
만해 아들이 월북한 사회주의 활동가였다는 사실을 용납 못해
만해 집안의 몰락 이유는 홍주의병… 처가는 제법 풍족한 집안
아들 한보국, 홍성지역 대표적 사회단체인 ‘가야동지회’ 조직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주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부락에서 관리였던 한응준과 온양 방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학동을 가르치다가 명진학교를 수학했다. 만해 한용운에게 자식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892년 한용운은 부잣집 딸인 전정숙과 결혼해 사회운동가로 월북한 아들 보국을 낳았고, 1933에는 당시 진성당병원의 간호사였던 유숙원과 재혼해 1934년 딸 영숙을 낳았다. 한영숙은 성북동의 심우장에 살다가 성북구청이 복원사업을 추진한 뒤로 이사를 갔다. 이렇듯 만해의 일점혈육으로 알려진 한영숙의 행적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만해의 또 다른 아들(한보국)이 있다는 사실과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 만해 한용운의 남 모르는 아들 한보국
우선 만해 한용운조차 자신의 아들에 대해 자세히 말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1930년 ‘별건곤(別乾坤)’에 실린 만해의 글 제목은 ‘남 모르는 나의 아들’이다. 생전의 만해조차 ‘남 모르는’이라고 할 만큼 그의 아들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한용운 평전’을 쓴 고은 시인조차 만해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만해의 고향인 홍성에도 만해의 아들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다. 이처럼 만해의 아들이 오리무중인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정도다. 첫째는 만해의 아들에 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간회에 관한 충실한 보고서라 일컬어지는 이균영의 ‘신간회 연구’에도 만해의 아들은 이름 석 자만 두어 번 등장할 뿐, 그의 자세한 활동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둘째로는 만해의 아들이 사회주의 활동가였기 때문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군사정권 시절 만해가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 역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만해의 아들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 자료가 온전히 보전될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모든 국민의 추앙을 받는 만해의 아들이 월북한 사회주의 활동가였다는 사실을 당시의 군사정권이 용납하기는 어려웠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만해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게 편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이처럼 분단은 만해의 가계조차 철저히 안개 속에 묻어버렸다.

하지만 역사란 마치 안개 속에 갇힌 섬과도 같아, 해가 떠오를수록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만해는 당시의 조혼 풍습에 따라 이미 열네 살이던 1892년에 결혼을 했다. 결혼 12년 만인 1904년 만해의 아내 전정숙은 바로 ‘남 모르는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만해 한용운의 아들 한보국이다. 한보국이 태어날 무렵 만해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으며 만해 역시 처가에 의탁해 지내고 있었다. 만해의 집안이 몰락한 이유는 홍주의병 때문이었다. 당시 만해의 아버지 한응준과 형 한윤경은 홍주의병과 관련해 목숨을 잃었다. 만해의 처가는 제법 풍족한 집안이었으나 역시 점점 가세가 기울었고 만해가 출가한 동안에는 몰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혼자 남겨진 만해의 아들 한보국은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거지나 다름없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보국은 그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1904년 12월 21일 홍주면 오관리 212번지에서 태어나 홍성공립보통학교를 제17회로 1927년 졸업했다. 동기들로는 홍성농민조합장을 지낸 이강세(이종민 홍성닷컴 대표의 부친), 홍성에서 제대 국회의원과 변호사를 지낸 김영환, 신봉철(신동석 전 홍성여고 교장의 부친) 등이 있다. 한보국은 1927년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 여름에 서울의 선학원으로 아버지인 만해 한용운을 처음으로 찾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봉은사 조실을 지낸 석주스님이 전한 만해 한용운에 대한 회고에 따르면 “1927년 여름, 만해 선생은 그에게 남은 한 점 혈육인 아들 한보국(韓輔國)을 신간회 홍성지회 사무실의 사환으로 채용토록 했다. 보국은 그의 아버지가 조선 천하의 명사인 줄도 모르고 홍성 거리에서 엿장수, 거지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던 터였다. 그는 손재학의 얘기를 듣고 신간회 이후 선학원으로 아버지 한용운을 찾아왔다. 선생은 아들을 보자 굳은 낯빛으로 “이미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다시 돌아가라”며 하룻밤도 재우지 않고 그 길로 보국을 쫓아냈다. 잠이라도 재우고 내일 아침에 돌려보내라는 주위의 청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고집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초라한 행색에 아버지의 이목구비를 빼닮은 그는 힘없이 돌아서서 어디로 가는지 어두운 밤거리로 사라졌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간 선생은 통 말도 없이 후원의 독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셨다.”고 회고했다.

■ 한보국 홍성에서 강창옥과 결혼
당시 동아일보 1927년 9월 1일자 보도에 의하면 신간회 홍성지회는 1927년 8월 25일에 설립됐다. 따라서 한보국이 1927년 23세에 홍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후반부터 신간회 홍성지회 사무보조로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8년에는 재정부에서 일을 하다가 1929년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이처럼 신간회홍성지회에 관여하면서 홍성사회운동의 인물로 활동했다.  1930년 1월 20일자 4면 보도에는 한보국이 ‘중외일보 홍성주재기자’로 나온다. 하지만 한보국은 1930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고 전해진다. 한보국은 중동학교 2학년 때 창덕궁 근처에 있는 민중서원이란 책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와 ‘제2의 가난에 대한 이야기’ 등 판매금지 된 책을 구입, 친구들과 함께 독서회를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를 한다. 1930년대 초반 한보국이 서울 서대문으로 이사와 모친(전정숙)과 생활했다는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1930년 9월 22일 중앙청년동맹 가입, 고려공산청년회 입회 조직책임자로 활동하던 중 1931년 7월경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이때 일제의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한 기록과 검거 문건에 따르면 한보국의 본적은 ‘홍성군 홍주면 111’이며 홍성신간회지 회원, 청년총동맹 회원, 당27세, 고려공산청년회 노동부 책임자로 사건관계가 표시돼 있다. 이 일로 한보국은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고 복역 후 1933년 9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했다. 이후 홍성으로 돌아와 칩거를 하다가 1934년 10월 16일부터 ‘동아일보지국의 총무’ 일을 했다. 이와 함께 철물점 경영도 동시에 한 것으로 보인다. 1940년 7월 26일 홍북면 내덕리 출신으로 사회주의운동을 하던 강창옥과 결혼한다. 강창옥은 1917년 1월 3일생으로 1904년인 한보국과는 13살 차이가 난다. 한보국은 결혼해 홍성에서 1남 3녀를 두는데, 장남 명진(1941년 4월 출생), 장녀 명숙(1936년 10월 출생), 차녀 명계(1939년 2월 출생, 삼녀 명자(1943년 7월 출생), 사녀 명세(1947년 6월 출생) 등인 것으로 나타난다.

출옥한 이후 홍성에서 토착적 사회주의 세력을 주도하면서 진보적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해방을 전후해 홍성지역의 대표적 사회단체인 ‘가야동지회’를 1943년 9월에 조직했는데, 한보국이 핵심인사의 일원이었다. ‘가야동지회’는 한보국을 대표로 했던 토착적 사회주의 인물과 중도우파 계열의 청년지식인이 공동으로 활동했는데, 여기에서 한보국의 융통성과 개방성을 엿볼 수 있다. 열두 명의 회원들은 한 달에 두 번씩 관솔을 따러 간다는 명목으로 도시락과 톱을 싸들고 수덕사 뒤의 가야산에 비밀리에 모였다. 회원들은 급격히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에 관한 정보교환과 향후 대책을 토론하기 위한 조직체로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보국은 1928~1945년의 공간에서 홍성지역에서의 독자적인 기반과 노선, 지향을 갖고 좌우합작의 성격을 띤 독립운동을 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념적으로는 중도적인 사회주의에 근거했고, 그를 기반으로 홍성지역의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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