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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특집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철조망에 갇힌 한용운 부모 묘소와 한보국 삶의 복권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7>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5.20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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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읍의 홍주고와 대우아파트 사이에 있는 한용운 부모 묘소 등 가족묘. 철조망 안에 갇혀있다.(아래사진 참조)

한보국, 홍성사회에서 한용운의 아들로 다 알았고, 호인으로 통해
6·25 때 한보국으로 인해 희생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한일은 없어
한보국 큰 딸 명숙 홍성 떠날 때 열세 살, 넷째 딸 홍성서 태어나
한용운·보국에 대한 조명 홍성사회에서 복권돼야 할 필요성 제기돼


“한보국은 전쟁나기 전에는 원래는 호인으로 소문났어요. 그거는 저의 선친하고 친구니깐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저로서는 인상은 좋았어요. 928수복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나서는 한보국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쁜 놈이라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다만 몇 사람은 호인으로 알다가 그 사람의 사상이 그런 줄은 몰랐다. 그렇게 골수 좌경분자인줄은 몰랐다고는 말했어요. 홍성지역사회에서는 한용운의 아들로 다 알고 있었고, 호인으로 통했어요. 6·25전쟁 때 한보국으로 인해서 희생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한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입장에서 저로서는 한보국을 너무 좌파로 몰면 안 된다고 봐요. 지금은 홍성에서도 한보국을 아는 사람이 몇 없어요. 그래도 일제 때에는 저항운동을 했으니까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저의 어릴 적 기억으로는 사업을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합니다.” 전 홍성고 교장과 홍성여고 교장을 지낸 신동석 교장이 홍성에서 본 한보국에 대한 증언이다.

이렇듯 한보국은 당시 홍성 오관리에서 철물점과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던 중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홍성군자치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건준이 해체돼 인민위원회로 바뀌면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한보국은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으로 홍성경찰서를 습격하고 서울로 피신했다가 1950년 3월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있던 중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석방돼 홍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좌익 지도자였던 전명재와 사상의 틈새가 생기면서 그해 8월 15일 인민위원장 선출 투표에서 탈락돼 충남도직업동맹위원장이라는 외곽 단체로 전출되면서 한보국은 홍성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 “통일이 되면 조상의 묘에 성묘하라”
한보국은 먼저 가족들을 강원도 연천으로 이동시킨 후 조직으로 돌아가 활동했다. 한보국의 가족들은 압록강 근처인 자강도 강계로 갔다. 이곳에서 중공군의 도움을 받아 평남 영원읍으로 옮겨 1953년까지 머물며 가족들과 소식이 끊기게 된다. 한보국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상을 당해 황해도 전상자병원에서 3년 동안 중환자로 입원 치료를 받는다. 이후 정신이 회복되면서 반신불수의 몸으로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서 각 군에 수소문한 결과 덕천 제사공장에서 일하는 맏딸 한명숙과 연결돼 1956년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당에서는 몸이 성치 못한 그였지만 평양시피복관리소 명예 부지배인 직함과 대동강변의 애국열사아파트를 한 채 제공했다. 김일성은 1964년 환갑상을 차려주고 노동신문에 독립운동가의 후손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면서 한보국의 존재를 소개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한보국은 국가 행사 등에서 귀빈자리 등을 제공받으며 생활하다가 1976년 “통일이 되면 내 대신 너희들이 조상의 묘에 성묘하라”는 유언을 딸들에게 남기고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남한, 특히 홍성에서는 한보국의 생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 동포 작가 홍정자가 북한에 들어가 한보국의 자녀들을 만나 인터뷰 한 내용을 월간 ‘말’지 1996년 1월호에 발표하면서 43년 만에 한보국의 생사와 가족들의 근황이 알려졌다. 홍정자 씨는 평양에서 1994년 10월 한보국의 딸 5명중 명숙, 명계, 명신 세 명을 만났다며 상세하게 썼다. 다섯 딸들은 평양공산대학 혹은 제사공장 공장대학, 고등전문 피복과 학교 등을 졸업하고 모두 김일성 종합대 출신 남자들과 결혼 해 30여명의 자손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고 썼다. 딸 네 명(명숙, 명계, 명자, 명세)은 홍성에서 낳고 막내 명심은 북한에서 낳은 딸로 추정된다.

한보국의 큰 딸 명숙이 홍성에서 떠나던 때가 열세 살이었고, 넷째 딸인 한명세는 1947년 홍성에서 태어났다. 한명숙은 홍정자와의 인터뷰에서 홍성에 대해 몇 가지를 기억하면서 아버지가 남겼다는 “통일이 되면 조상의 묘에 성묘하라”는 유언을 했다고 전했다.

한보국의 딸들을 만난 홍정자는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백건우의 누이로 서울예고와 이화여대 조소과, 이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진보적 통일주의자인 홍동건 목사와 결혼했다. 홍 목사와 북한을 왕래하던 중 조국통일북미주협회 민족문화위원장으로 있던 홍정자가 1994년 10월 북한에서 한보국의 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법타 스님(동국대 정각원장)의 부탁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밝힌바 있다.

■ 만해 부모묘소는 철조망에 갇혀 있어
홍정자의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기 이전까지 홍성에서 한보국의 존재는 모두 사라졌다. 한보국이 1944년 8월 9일에 구입한 것으로 등기부등본에 나와 있는 오관리 474의 3번지 175평의 한보국의 집터였던 대지는 이미 유력자들의 손에 의해 점유됐다. 이 토지는 1964년 7월 6일 박흥양 전 홍성군수가 한보국으로부터 매입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1964년은 한보국이 홍성을 떠난 뒤 10여년의 세월이 지났고, 특히 한보국이 평양에서 환갑상을 받던 해였다. 실제 매입과 등기 이전 날자가 다른 것은 보통 있는 일이지만 1953년 국군의 추격으로 도망가는 한보국이 공무원에게 집을 팔고 갔을지는 정말로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더욱이 홍성군수가 직접 매입한 대목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이에 대해 한용운의 종손인 한수만은 “남의 재산관리를 맡은 사람들이 주인이 없자 부동산특별조치법 등을 이용해 자신의 것으로 돌려놨을 것”이라고 생전에 말했다. 이 토지와 집은 1970년 홍주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월곡학원으로 편입돼 사라져 버렸다. 월곡학원이 운영하던 중앙연탄 자리 옆에 있다가 최근에는 홍성읍사무소를 신축하면서 헐려 없어졌다. 다만 인근에 남아있는 한보국과 관련이 있는 것은 홍주고등학교 본관 3층 건물과 대우아파트 사이 100여평의 잔디밭에 있는 6기의 묘소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한용운의 종손인 한수만은 이 묘소들이 한용운의 부모와 한용운의 친형 부부 등이 묻힌 가족묘라고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이 묘소는 홍주고등학교와 민가 양쪽에서 각각 사람 키보다 높은 파란색 철조망을 쳐 놓아 들어가는 길조차도 없이 완전히 막혀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 부모가 갇혀있는 꼴이다.

홍주중·고등학교재단인 이규용 신암학원 이사장에 따르면 “묘소가 도시 중심지에 학교와 붙어있어 서로 불편하기 때문에 팔고 좋은 곳으로 이장하라고 권고했지만 팔지 않고 방치돼 있다”며 “간혹 인천에 산다는 혈족이란 사람과는 연락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남북분단 상황에서 이념문제로 가슴앓이를 했던 후손들의 아픔을 떠나 한용운이 조명되고 있듯 한보국에 대한 조명도 홍성사회에서 복권돼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한보국은 세상을 떠났지만 북한에서도 한용운에 대한 평가는 지속적으로 고양된 것으로 보인다. 1985년 김정일로부터 한용운의 작품을 널리 발굴하라는 특별지침이 있었고, 1992년 제2차 문예방침에 의거 한용운에 대한 소개를 하라는 지침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에서 한용운을 평가하는 흐름은 한보국과 그의 딸, 사위 등의 존재와도 무관치 않은 일이라는 추정을 할 뿐이다. 북한에서 태어난 한보국의 딸인 한명심이 2001년 12월 29일자 ‘통일신보’에 기고한 ‘추억의 붓을 들고’라는 기고문에서 볼 때 북한에서의 한용운에 대한 평가와 한보국의 삶과 역사에 대한 평가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자료와 행적만큼이나 한보국에 대한 재해석과 다양한 자료도 함께 수집·정리돼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홍성에서의 한용운 중심의 선양사업에 한보국도 포함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에서 홍성의 사회운동을 포함한 홍성지역사 연구에 역사의 복원과 화해라는 인련의 측면에서 한보국의 삶에 대한 객관적인 복권작업이 요구되고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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