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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나의 힘

법(法)은 의외로 쉽다. 쉬울 뿐 아니라 단순하기까지 하다.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법은 ‘입장 바꿔 생각하기’라는 아주 단순한 원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해 본들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일 것이니 어려울 것 없긴 마찬가지다. 그런 법이 막상 우리 삶에서는 왜 이토록 복잡하고 어렵기만 한 걸까.

그래서인지 우리는 법이 사람을 괴롭힌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법을 괴롭히는 경우가 더 많다. 거기에는 ‘공감’이라는 요소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상대에 대한 공감, 상황에 대한 공감이 결여되면 우리는 ‘일방적’ 사고라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그 혼돈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 당사자 간 합의가 불가해지고 결국, 법정에까지 가게 된다. 소송 남발의 원인인 ‘일방적’ 사고는 바로 공감 능력 결여의 산물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부정과 모욕이 난무하는 패륜적 분위기 속에서 39돌을 맞았다. 오지 말라는 데도 기어이 뚫고 들어가는 오기와, 비난의 나팔을 준비하고 시비를 기다리는 적대감 앞에서 용서와 화해는 요원하며, 화합은 꿈도 꾸기 어렵다. 이런 후안무치(厚顔無恥) 역시 상대의 상처에 대한 공감 능력 결여에서 나온다. 인권과 평화의 상징이자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법률가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처방을 내놓을 것인가.

“누구든 노예 제도에 찬성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에게 직접 노예 생활을 시켜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섬뜩하다. 나치를 옹호하는 자들에게 유대인 수용소를, 일제 학살, 광주 학살을 부정하고 망언을 일삼는 자들에게 그 지옥 같은 고통을 똑같이 체험케 하고 싶은 3800년 전 ‘함무라비식 복수법’의 분노를 부르는 일갈이다. 공감 능력을 상실하고 이기주의에 매몰된 21세기 집단과 개인에게는 그 어떤 처방보다도 이 점잖은 19세기 키다리 아저씨의 ‘보복적 분노’가 더 효과적인 경고가 될 것 같다.

공감 능력이 결핍된 정치는 그 집단의 사고를 파시즘으로 이끈다. 그 정치인을 괴물로 만든다. 사람에게 향해야 할 공감이 권력이라는 욕망에만 몰입된 나머지 권모와 술수, 음해와 야합이 난무하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정치인은 드물다. 대부분은 악에 대한 분노와 일정 정도의 정의감과 함께 출발하기 마련이다. 인간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감 능력에 문제가 생기는 순간 균형은 깨진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랜 시간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보리니.” 니체는 어두운 심연, 곧 내면의 악과 싸우다가 결국 자기 분열로 이어지는 비극을 경계한다.

가족을 살인으로 잃은 사람이 복수하다가 살인자가 된다. 폭력에 상처받았던 사람이 폭력배가 되고, 악소문에 고통받던 이가 악소문의 생산자가 돼서 법정에 서는 식의 비극을 드물지 않게 본다. 과거의 고통을 망각한 결과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질 때,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나아갈수록 원래의 자신에서 더 멀어진다. 부끄러움을 잊고 강해졌다고 애써 자부해봐도 사실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이 모두가 역지사지의 균형 감각을 잃게 돼서 생기는 비극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 이 단순한 태도가 우리를 소송에 들지 않게 하고 허다한 갈등에서 구원해 준다. 공감만이 우리를 인간이게끔 한다. 공감 능력은 나를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지켜 주는 힘이다.

강희권 <변호사·칼럼위원>

강희권 칼럼위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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