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 ‘군자정 돌다리’ 고려시대 축조 문화유산 가치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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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 ‘군자정 돌다리’ 고려시대 축조 문화유산 가치 높다
  • 취재=한기원 기자/사진·사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8.0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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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다<3>
당진 면천의 군자정 돌다리는 1803년 축조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문화유산의 가치가 높다.

군자정돌다리 길이 7.4m, 폭 65cm 고려시대 축조, 문화유산 가치 높아
1803년 축조된 원래 모습 그대로 유지, 문화유산 가치 있는 옛 돌다리
1994년 1억 7000만 원을 투입해 팔각정으로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러
“강희 기원후 기해년에 복지견의 후손 복지구가 다시 세웠다”중수 기록


당진시 면천면에 있는 ‘군자정(君子亭)’은 당진시 향토유적 제1호다. 선비들이 머물러 풍류를 즐기고 시를 읊었던 곳이다. 면천면 성상리 성안에 있는 군자정은 지금은 폐교된 면천초등학교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정자는 1994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군자정이 있던 군자지(君子池)는 옛 면천초등학교 동편 은행나무 밑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창건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시대 지주사였던 곽충룡 군수가 객사 동쪽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알려져 있는 군자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00년대 후반에 나온 ‘면천읍지’로 “1863년에 새로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같은 문헌의 누정조에 ‘군자정기’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1863년 당시의 면천군수 유한재가 군자지를 보수하면서 못 가운데 둥글게 섬을 만들고 그 위에 8각의 정자를 짓고 못에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는 1994년 건강한 국토 가꾸기 사업으로 팔각의 정자와 사각의 연못을 복원해 관리하고 있다.

군자정으로 건너는 돌다리는 길이가 7.4m, 폭이 65cm로 고려시대 축조돼 문화유산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돌다리는 자연석 네 개로 조성돼 있다. 군자정과 군자지가 세월의 흐름속에 수차에 걸쳐 중수를 거친 것에 반해, 군자정 돌다리는 1803년에 축조된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는 옛 돌다리로 알려져 있다.

■ 당진 향토유적 1호 면천군자정(沔川君子亭)
당진시 향토유적 제1호인 ‘면천군자정(沔川君子亭)’은 1803년 당시 면천군수였던 유한재가 면천객사(沔川客舍) 옆에 군자지(君子池)를 준설해 연꽃을 심고, 연못 안에 조그만 섬을 만들고 섬 안에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이 19세기경에 편찬된 ‘면천읍지’에 전해지지만 언제 허물어졌는지도 모르게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1959년에 면천복씨(沔川卜氏) 종친회장 복진구가 주춧돌보다 규모가 작은 육각정으로 다시 지었다. 이후 1993년 5월 21일 이 정자를 당진군 지정 문화 유적 제1호로 지정해 관리했다. 그런데 1993년에 문화유적 제1호로 지정했던 정자를 헐어 버리고 1994년에 ‘건강한 국토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국비와 도비, 군비 등 1억 7000만 원을 투입해 팔각정으로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03년(순조 3)에 면천군수로 재임하던 유한재가 정자를 짓게 된 배경과 정자와 연못에 대한 의미를 기록한 일종의 누정기(樓亭記)가 전해지고 있다. ‘군자정기(君子亭記)’에 따르면, 유한재가 부임한 이듬해에 무너진 군자지(君子池)에서 연꽃이 피어난 것을 보고 옛날 고려 공민왕 때 지주사였던 곽충룡이 군자지(君子池)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허물어진 연못을 준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준설 때 나온 흙을 모아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고 섬 위에 작은 정자를 지었으며, 연못에 100개의 연꽃을 심고 정자 주위에 꽃과 나무를 심었다. 연못이 네모진 것은 땅을 상징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며, 정자가 팔각인 것은 팔괘(八卦)를 상징한 것이고 꽃과 나무는 만물을 상징한 것이라 했다.

결론적으로 ‘군자정(君子亭)’이 있는 ‘군자지(君子池)’는 고려 공민왕 때 지주사 곽충룡 군수가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이것을 익재공 이제현이 칭송해 말하기를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으며, 진흙에서 나왔어도 물들지 아니하여 군자와 같아서 연계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이것이 못 이름을 군자라 한 이유이다”라고 했다.

‘군자정기(君子亭記)’에 “내가 이 군에 부임한 다음해인 계해년에 연꽃이 홀연히 무너진 못 두서너 곳의 둥근 연꽃 밭에서 자라났는데, 연꽃은 잡초 가운데 있었다. 물은 얕고 말라붙어 연잎이 시들고 쇠약해 졌다.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또 안타까워 애석하게 여겼다. 이에 아전을 시켜 그 못을 치게 하고 사방의 흙을 모아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고 그 위에 팔각의 작은 정자를 만들고 연꽃 백 개를 심고 고기 천 마리를 넣고, 둘레에는 복숭아와 버드나무를 심고 안에는 온갖 꽃을 심었다. 못이 네모진 것은 땅을 상징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요, 정자가 팔각인 것은 팔주를 상징한 것이고, 꽃과 나무는 만물을 상징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1719년 군자정 중건 기록 전해져

이태백이 썼다는 낭관호(朗官湖) 빗돌.

이후 허물어진 것을 “강희 기원후 기해년에 복지견의 후손 복지구가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군자정중수기’에 기록돼 있다. 여기서 ‘강희 기원후 기해년’이면 ‘조선조 숙종 45년, 서기 1719년’에 해당한다. 군자정을 중건하면서 원형보다 축소해 육모정으로 지었는데, 원래의 주춧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중수기에는 ‘낭관호(朗官湖)’와 ‘군자정(君子亭)’이 예전부터 있어 역대 관헌의 보호를 받아 오던 중 곽충룡, 이상만 등이 중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자정(君子亭) 옆에는 이태백(李太白)이 썼다고 하는 ‘낭관호(朗官湖)’라고 한자 흘림체로 쓴  음각된 빗돌이 지금도 의연하게 서 있다.

‘군자지(君子池)’는 모래와 흙으로 메워져 흉한 모습이었으나 지난 1988년에 준설작업을 하고 돌로 쌓아 단장했으며, 1994년 건강한 국토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팔각의 정자와 사각의 연못을 복원해 관리해 오고 있다.

면천읍성 옆에 있는 ‘군자정(君子亭)’ 안내 간판에는 ‘당진군 향토 유물 제1호, 면천면 성상리 778’이라는 기록과 함께 “군자정은 고려 공민왕때(서기 1350년대) 지군사(군수) 곽충룡이 군객사 동쪽에 정자를 짓고 둘레에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는데 진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아니하고 군자와 같아서 군자정이라 하였다. 이 곳은 옛 선비들이 머물러 풍류를 즐기고 시를 읊었던 곳으로 1994년 건강한 국토 가꾸기 사업으로 팔각의 정자와 사각의 연못을 복원 관리해 오고 있으며 군자정으로 건너는 돌다리는 자연석 네 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길이가 7.4m요 폭이 65cm로 이는 고려 때 축조된 것으로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서기 1997년 11월 15일 면천면장 서립”이라고 적어 ‘군자정’을 복원한 과정을 안내하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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