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빛깔의 돌다리, 600년 역사의 비인 청석교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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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빛깔의 돌다리, 600년 역사의 비인 청석교 돌다리
  • 취재=한기원 기자/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8.1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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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다<4>
서천 비인의 비인초등학교 앞 개천에 놓여있는 청석교 돌다리. 안내간판도 설치돼 있지 않다.

비인지역, 해안변을 끼고 있어 오래전부터 왜적의 침입이 빈번
청석교 돌다리, 길이 460㎝ 너비 160㎝의 상판만 냇가에 남아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문화재지정 포함 관리 필요
서천군청, 청석교 돌다리 알리는 안내간판도 설치해 놓지 않아

서천군 비인면은 조선시대 비인현이 있던 유서 깊은 고을이다. 그런 까닭으로 비인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고 생활하였음을 입증하는 유적 등이 남아 있다. 서면, 비인, 종천지역은 특히 고인돌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가 흔히 비인오층석탑으로 불리는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보물)이다.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을 닮은 아름다운 고려시대 석탑이다. 비인읍성 성곽도 일부지만 남아 있다.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고려시대의 토성을 조선 세종 때 석성으로 개축한 읍성이다. 비인지역은 마한시대 54개국 중 비미국(卑彌國)이 자리하고 개별적으로 성장해 오다가 3세기에 이르러 백제에 부속됐다.

백제시대에는 비중현(比衆縣 또는 비비현), 신라 경덕왕15년(756년)에 비인현(庇仁縣)으로 개칭됐고, 조선 고종32년(1895년) 5월 28일 현(縣)이 군(郡)으로 승격됐으며, 일제가 1914년 비인군을 폐합해 서천군에 편입하고 비인면(庇仁面)으로 전락시켰다.

■ 비인의 옛 영화·중요 군사지역 유적 많아
비인에서 가장 이름난 문화재는 성북리오층석탑(비인오층석탑, 보물 제224호)이다. 백제 때 세워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을 모방해 고려 때 세운 석탑이다. 모방했다고는 해도 당당한 자태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단순 비교하는 건 무리다. 무엇보다 비례가 맞지 않아 어색한 느낌이다. 이는 4, 5층 사이의 탑신에 있어야 할 지붕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6.2m에 달하는 체구는 퍽이나 당당하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자태에서 무게감도 느껴진다.

옛 비인군 지역은 해안변을 끼고 있어 오래전부터 왜적의 침입이 빈번했다 세종12년(1430년) 9월 24일 도순찰사(道巡察使; 재상으로 왕명을 받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파견한 정부관리) 최윤덕(崔閏德)의 장계를 올려 아뢰길, 충청도 비인의 읍성은 바닷가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해구(海寇; 해적)들이 가장먼저 발길을 들여놓는 지역이라 성터로써 적합지 않으니 비인현의 죽사동(竹寺洞)으로 옮길 것을 주창, 그 해 10월부터 비인읍성 축조공사가 이뤄졌다. 비인읍성은 성내리 시가지를 중심으로 비인초등학교 북쪽과 동쪽에 성벽이 잘 남아 있다. 동쪽의 성벽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지금도 자라고 있다. 이와 같이 대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옛날에는 죽사동(竹寺洞)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세종29년(1447년) 실록에는 비인현감(庇仁縣監) 박희굉(朴喜宏)이 부임지로 떠나기 전 세종임금께서 친히 불러 하교하길, 비인 고을은 해변 방어의 땅이니 군사에 관한 일을 소홀하게 하지 말고 정성껏 하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이와 같이 비인지역은 해변에 위치하고 있어 조정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인군수의 임명은 주로 무관출신을 임명했으며, 비인지역은 중요한 군사지역으로 월명산 관적 곡산성을 비롯해 크고 작은 산성이 자리하고 있음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비인 읍내에 있는 외벽이 인상적인 비인향교 들머리의 하마비와 느티나무, 옛 장터 앞의 ‘독다리’(청석교), 25개에 이르는 관찰사와 현감 등의 선정비와 불망비 등을 통해서도 비인의 옛 영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

■ 600년 세월 변함없는 청석교 돌다리

비인 성북리 5층 석탑(보물).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비인초등학교 앞 개천에는 조선시대 옛 장터 길목에 놓인 돌(독)다리(청석교)가 남아 있다. 미용실 옆 도랑 위에 걸려 있다. 비인중학교 옆 비인향교 들머리엔 20여기의 조선시대 불망비·선정비 무리가 모여 있고, 옛 청화역이 있던 정자 옆엔 200여년 수령의 느티나무도 서 있다.

특히 비인읍성 안에 있는 비인초등학교 앞으로 흐르는 냇가를 따라 비인면사무소 앞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 청석교(靑石橋) 돌다리는 길이가 460㎝ 너비는 160㎝의 일부 상판만 냇가 위에 지금도 남아 있다. 돌다리는 자연판석으로 검푸른색 청색 빛깔을 띠고 있다. 제작 연대는 조선 태종12년∼조선 세종12년(1414~1430)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 세종실록, 호서읍지, 충청읍지, 비인읍지 등에 기록돼 있다.

청석교(靑石橋) 돌다리는 흐른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돌다리 한쪽 모퉁이에는 아스콘으로 자연석 검푸른 돌 판을 살짝 덮었다. 아마도 길과 다리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바른 것으로 추정되지만 흉한 모습이다. 길이가 채 5m도 안 되는 돌다리지만 옛날에는 소중했을 것이다. 무려 600년 세월을 변함없이 견뎌온 푸른 빛깔의 돌다리다.

그렇다면 청석교(靑石橋)는 언제 설치된 것일까? 설치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문헌자료를 토대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청석교는 18세기에 발간된 각종 관찬읍지(官撰邑誌; 관청에서만든 역사책)에 비인읍성 내로 흐르는 하천에 설치된 것으로 읍지도(邑地圖; 행정지도)에 표기되고 있다. 청석교의 이름은 아마도 돌의 색깔이 푸른색을 띠고 있어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종지리지를 보면 태종12년(1414년) 관청과 공문서의 전달 관리들의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청화역(靑化驛)을 설치하고 있다. 청화역의 역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청석교(靑石橋)도 이 청화역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1430년 읍성을 축성하면서 기존 왕래를 위한 다리로 설치한 청석교를 읍성을 쌓으면서 읍성(邑城)안으로 편입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판석위는 당시 많은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드나들었던 흔적으로 반질반질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청석교(靑石橋)는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문화재 지정을 포함한 관리가 필요한 문화재임에는 틀림없다. 일반인들은 어떤 돌인지도 쉽게 알 수도 없고 관리하는데도 무관심해 언제든지 훼손될 우려도 있다. 향후 문화재로 지정해 역사적인 자료가 사라지지 않도록 관심을 갖고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관리를 해야 할 서천군청에서는 청석교를 알리는 안내간판 하나도 설치해 놓지 않았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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