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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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8>
  • 한지윤
  • 승인 2019.09.0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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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윤의 청소년 역사교육소설

백제는 처음에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고, 또 국모가 죽은 후 한산 밑으로 도성을 옮겼다. 이와 같이 도성을 정함은 국모 소서노의 지혜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고구려의 구신이요, 신임 있는 열 명의 신하를 소서노가 이끌고 남으로 남하했던 것이다. 물론 백제에는 온조왕도 있었고 열 명의 신하도 있었다. 그러나 온조왕은 아직 20세 전후요, 경륜이 적으므로 국모 소서노는 비록 수렴청정(垂簾聽政)은 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국사(國事)의 결정은 왕도 어머니의 청고에 따랐던 것이다. 따라서 한수 변에 도읍을 정한 것은 소서노의 뜻이라 하겠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은 물을 중심으로 하여 문화가 형성됐다. 그러므로 물의 문화를 아는 것은, 그 시대의 소서노를 비롯한 모든 어머니들의 생활을 아는 척도가 될 것이다.
원래 물의 이용은 농경생활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처음에는 자연히 흐르는 하천의 물을 이용해 농작물을 재배했었다.

이러한 형태는 메소포타미아 등 나일강 유역이나 또 인도의 캐시미르 유역의 강물을 이용하는 농사법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들의 농경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형태로 발전했던 것이다. 즉, 이것이 물의 문명이며 이른바 정전제에 따르는 농경 방법이라 하겠다.
그 시대에는 격강이 천 리라해 큰 강을 건너려면 천 리 길을 돌아가야만 그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이는 농경사회 초기의 현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인들은 서구의 농경사회와는 달리 이 물을 이용하는 문명으로 농사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강을 건널 수 있는 배를 만들었으며 또 강물이 범람해 농작물을 쓸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홍수로 농작물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 물을 강으로 흐르게 했고 가뭄이 심할 때는 우물을 파서 그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법 등을 개발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농경생활은 다른 나라의 농경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형태는 아버지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문화도 많겠지만 그 가정을 지켰던 어머니들의 슬기에서 창조된 것이었다.

물론 생명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물을 이용한 생활 문화는 어머니들의 슬기로 섬세하게 가꾸어지고 다듬어져 우리에게 전승됐다. 따라서 그 시대의 하천, 강, 우물 등은 이 겨레의 맥줄과도 같이 소중히 여겨졌으며 어머니와 같은 대명사로 인식됐다.
신라의 알영후의 이름을 알영정이라고 한 것도 만민의 생명수가 될 우물이라, 결국은 알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옛 기록을 연구하고 이론적으로 해명하면, 우리는 오히려 어머니들의 역사에서 더욱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도 아리랑의 역사를 모르고 있다.
아리랑은 곧 아득했던 옛날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키우고 교육시키며 대대로 물려주려고 가꾸어 놓은 농경의 문화인 것이다. 어머니들의 곱던 손을 마디마디 멍울이 지도록 만들었던 소박한 궤짝, 그리고 흙으로 빚어서 만든 항아리들이다. 어찌 그 뿐이랴! 추운 겨울에는 사랑하는 자식들이 굶어 죽을까봐 김장, 깍두기, 간장, 된장, 장아찌 등을 정성들여 담가놓고 자식들의 입맛을 돋구어 주었다. 또한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이것을 물레에 걸어 실을 뽑고 베틀에 짰다. <다음호에 계속>

<이 소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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