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곁으로 한 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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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곁으로 한 뼘 더
  • 한학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9.22 08: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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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다양한 도구로 소통한다. 언어의 사용은 인간이 이뤄낸 최초의 의사소통 혁명이다. 서로 나누는 과정에서 생각 체력이 사회적 시선과 맞닥뜨릴 때 비로소 가치로 창출된다. 매사에 누군가는 최초로 삽을 뜨고, 후세의 디테일이 더해져 길이 된다. 지금껏 역사는 작은 발자국의 결집이었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본다는 말은 역사의 힘을 의미하는 거다.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면 콘텐츠를 더욱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좁은 길에서는 한 걸음 양보해 상대를 먼저 가게 하는 배려, 삶에서 한 걸음 양보하고 물러나는 것이 서로 공덕(公德)인 셈이다. 사사로운 욕심이 지배하는 삶, 지나치게 감정이 메마르고 각박하게 사는 것은 진정한 소통의 의미와 거리가 멀다.

유구한 역사 뒤안길엔 항상 ‘그들’의 역할이 있다. 위인이라 불리든가 아무개라고 불리든가 훌륭한 인생이다. 기회는 늘 준비된 자의 뒤를 따른다. 결코 게으른 자와 만나지 않는다. 해서 어질고 슬기로워 사리에 밝은 사람은 다가오는 기회 보다 찾아 나서는 기회를 모색한다. 그에겐 사물을 남다르게 보는 밝은 눈이 있고, 텅 빈 상태에서 충만감을 느끼는 철학자의 배고픔도 있다. 치열한 경쟁에서 그 누구도 이기지 않았는데,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는 자존감이 그들을 지탱한다. 그런 깨달음이 발전적인 삶의 지평을 여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시대변화에 따라 새롭게 기준이나 표준을 제시할 수 있고, 실체 있는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질곡의 역사에도 새날을 바라는 간절한 외침이 있었다. 희망을 품고 두려움을 껴안은 채, 격전의 전투가 있었고 문화는 후세에 전해졌다. 영화 <아리랑>은 민족영화이며 민중 영화다. 주인공 영진(나운규 분)은 일본 순사의 손에 끌려 아리랑 고개를 넘는다. 그 광경을 지켜본 동생 영희와 친구 현구, 마을 사람은 영진의 부탁으로 슬픔에 잠겨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랑에는 나라 잃은 백성이 겪어야 하는 애절한 슬픔이 배어 있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의 비애와 항일 정신을 절묘하게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당시 영화관에서 영화가 끝나면 감격한 관객은 목 놓아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고 한다. 영화 한 편이 암울한 시대를 함께 견딘 민족에게 크나큰 문화 변동의 계기가 된 셈이다. 

이렇듯 문화적인 선구자는 경험된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베일을 거두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충족시켜 그가 가진 전문성을 친화력으로 전파하는 매력도 있다. 인품과 개성을 결합해 능숙한 솜씨로 대중을 품는 솜씨 또한 일품이다. 이렇게 문화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의미의 체계이며, 오랜 인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대중의 문화적 소통 능력을 높이고 문화적 삶의 질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삶의 방식과 가치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다채로운 사회변화는 이렇게 사람의 관심을 문화와 여가, 오락 영역으로 관심의 폭을 확장해 나간다. 이런 과정에서 좋은 사회와 문화를 생각하고 추구하려는 우리의 태도와 자세는 중요한 덕목이다. 사회 전체의 문화가 조화롭고 창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잣대이다.

세상의 뭇 현상은 다채롭고 복잡해도 본질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런 사회 현상을 해명하려는 경험 과학은 ‘통찰적 시각’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민중 운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노동자들이 무수히 승패를 넘나들었듯이, 세상을 바꾸려는 행위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몰입해야 한다. 에디슨이 달걀을 삶는다는 것이 시계를 삶았다거나, 어떤 학자가 연구에 몰입하다 고개를 드니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는 일화처럼, 시간과 공간의 경계조차 초월한다. 기회는 늘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섬광처럼 왔다가 홀연히 간다. 현대사회는 사람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대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 최소한의 침묵과 사색을 통해 나 자신을 관찰하고 바로잡는 시간은 늘 진행형이어야 하는 이유다. 어떤 태도를 지니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사람의 재능과 불꽃, 그 창의성이 빛을 발휘하는 엄중한 시대를 산다. 
가치 지향적인 인생의 목표를 설정했다면, 삶의 전반 과정이 무르익을 때까지 거기에 부합해야 한다. 유연하되 좌고우면하지 않고, 열정을 한군데 모아 응축할 때, 척박한 땅에 싹이 트듯 희망은 현실이 된다. 결핍의 고통이 극대화될 때를 견뎌낸 후에도 삶은 여전히 고뇌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강렬한 아침 햇살처럼, 늘 그렇게 청년 같아야 하는 거다. 인류학자나 생물학자는 이런 사람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했다. 시대변화와 관계없이 여전한 것은 머리로 사는 삶보다 가슴으로 사는 삶이 공감력이 크다. 삶을 배우려면 일생이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늘 배우며 살라고 한다. 작가 한강은 그의 시집 제목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고 썼다. 우리는 각자 삶의 창고에 무엇을 넣어 둘까. 혼자 있을 때도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한 채 부끄러움을 느낄 몸가짐으로 살 일이다. 소통을 통해 인간의 역사는 이어져 왔고, 그 자체로 심오한 통찰을 던지고 있다.

한학수 <청운대 방송영화영상학과 교수,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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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삼 2022-09-23 18:27:31
인간은 소통을 위해 언어를 창조하고 그 소통이 문화와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칼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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