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27>
상태바
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27>
  • 한지윤
  • 승인 2016.09.27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그래, 젊음은 아름다운거야

곤경에 처해 있을 그 때, 길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소영이는 말에서 내려 얼른 뛰어나가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나무 그늘 사이의 여린 햇살에서도 눈이 부실만큼 희디 흰 셔츠를 입은 젊은 청년이 의아한 듯 말했다.
“자동차 사고가 아니라 타고 있던 말이 움직여 주지 않아서……”
“끌어내 드릴까요?”
훌쩍 말에서 뛰어 내린 청년은 의외로 키가 큰 편이었다. 그는 다소 사나운 듯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풀숲에서 풍겨 나오는 풀향기와 훈훈한 열기뿐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다만 들새들의 노래하는 소리가 머리 위의 나뭇가지에서 들려왔다. 소영이의 가슴에 갑자기 한훈찬씨의 일이 떠올랐다. 그는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내게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일까. 지금 소영이가 잠시 동안이나마 근사한 사나이와 숲 속에서 단 둘이 있다는 사실도 그는 모를 것이다.
풀을 뜯어 먹고 있던 말은 사나이의 손에 체념이라도 한 듯 길가로 끌려 나왔다.
“훌륭한 솜씨군요. 감사합니다.”
“휴가 중 이곳으로 와 승마를 즐기고 있는 겁니다.”
“직장에 다니시나요?”
“외교관입니다. 댁은?”
“아저씨하고 둘이서 와 있는 걸요.”
소영이는 긴장하고 있었으므로 약간 어깨를 움츠리면서 대답했다.
“오늘 밤 함께 산책이라도 하실까요? 속리산은 밤공기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어젯밤은 달빛이 유난히 밝아 마치 무중력 상태 같은 바다 밑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 이었죠”
“네에, 좋아요.”
“그럼 7시에 L호텔의 로비에서……”
사나이가 사나운 기세로 말을 몰고 가버린 뒤, 소영이는 터벅터벅 말을 몰아 한훈찬씨가 기다리고 있는 승마장으로 돌아왔다. 소영이는 외교관인 젊은 청년과 만났다는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한찬훈씨와 골프 크럽에서 커피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했다. 한찬훈씨는 술을 마셔 얼굴에 취기가 올랐고 소영이 에게도 마시라고 권했다.
약속시간이 되자 소영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식사하던 자리를 빠져 나왔다. 서둘러 방으로 와 메모지에다 아래와 같이 썼다.
-- 제법 근사한 보이 프렌드가 생겼습니다. 산책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다녀와야 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오늘 밤 편히 쉬세요.--
사나이는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오늘 밤도 달이 휘영청 밝았다. 두 사람은 자작나무 숲 속 달빛이 희푸르스름하게 비치는 고요한 분위기 아래서 키스를 했는데, 소영이는 그가 기대에 어그러진 따분한 사나이라고 느꼈다.
소영이가 숙소로 다시 돌아온 때는 밤 9시쯤이었을까, 밤 9시쯤이었을까, 그녀는 방문을 열었을 때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다. 혹시 방안에 숨어 있던 한훈찬씨에게 붙들려 일이 저질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소영이는 조심스럽게 벽장이며 옷걸이장 속까지 열어보면서  그가 방 어느 곳에 숨어 있지 않은가 긴장하며 살폈다. 이윽고 그녀는 급히 출입구 방문을 닫아걸고 휴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소영이는 웬지 이대로는 뭔가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방에서 인기척이 없는 복도를 끝편까지 걸어가 한훈찬씨의 방문을 가만히 노크했다. 아무 응답이 없다. 조심스레 문을 밀어보니 한훈찬씨는 잠이 들어 있었다. 불현 듯 소영이는 이 남자를 골탕 먹여 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도리어 심장의 고동이 급속히 빨라져 옴을 느꼈다.
외교관 청년은 다음날 아침에도 유혹해 왔지만 소영이는 거절 했다. 다음날 오후 속리산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이상하게도 줄곧 한훈찬씨와 붙어 지냈다. 그렇다고 완전히 경계를 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영은 자신이 어쩐지 행실이 반듯한 이 중년사나이 곁에 붙어 있는 간호사와도 같은 기분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서울에 돌아온 뒤,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외무부에 조회를 해보니 외교관이라던 청년은 단순히 외무부직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소영이는 씁쓸했다. 특별히 외교관이라고 해서 끌렸던 것은 아니지만 산 속에서, 더군다나 달빛이 휘영청 밝은 희푸스름한 분위기 속에서의 데이트의 기억은 그 씁쓸함을 더 한층 어둡게 했다. 그러나 승마 도중 곤경에 처했을 때 나타난 그의 훤칠한 모습은 얼마나 가슴을 두들겼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훈찬씨라는 남자만큼 기묘한 인간은 없는 것 같이 여겨졌다. 소영이는 아직 그와는 의식적으로도 손가락 하나 닿은 적도 없다. 아무리 중년이라지만 그도 역시 사나이다. 젊은 아가씨와 함께 지내고 있었으므로 손목 정도는 잡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아니면 소영이 자신에게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없는 것일까.
한훈찬씨는 자신의 집을 절대로 찾아 와서는 안 된다고 극구 당부했었는데, 소영이는 어느 날 그의 말을 무시하고 어슴프레한 기억을 더듬어, 번지를 물어 가며 한훈찬씨의 집을 찾아 헤맸다.
혹시 한훈찬씨가 말하던 주소에 그가 살지 않는 거짓말이 아닌가 우려도 했지만 근처 구멍가게에서 물어보니 OO증권에 다니는 한훈찬씨 라는 게 사실로 밝혀졌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다.

<계속>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