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지추(囊中之錐)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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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囊中之錐)여, 오라
  • 한학수 칼럼위원
  • 승인 2017.07.2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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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은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있길 바란다. 그때 속마음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들이여, 진정한 나를 얻고자 한다면 나를 미련 없이 버릴 때 비로소 나를 얻고 나를 찾으리라”라고 석가는 말했다. 매사에 조급해하고 편의성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이 문명의 이기(利器)를 불러왔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는데 급격하게 발산하며 허탈해하고 우울해 한다. 간혹 젊은 세대의 주체 못할 타오르는 불길은 사회문제로 대두돼 세상을 극도로 불안하게 한다. 삶은 인간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고 또 인간은 삶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역행하는 일탈이다.

미래의 리더는 청년이다. 그에게는 주인이 돼 살아갈 미지의 세계가 있다. 따라서 언제나 현실사회의 문제 앞에서 결코 침묵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물론 기성세대가 물려준 유산을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그들이 성장하기 위해서 닥쳐올 새로운 질서에 방황하고 고민하며 능동적으로 맞서야 한다.

스위스의 철학자 아미엘은 “1000걸음 나아가다 999걸음 물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진이다”라고 했다. 바른 길을 찾아 헤매는 게 좀 더디 가더라도 헛걸음이 아니고 시간낭비 또한 아닐 것이다. 노력의 일환일 테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인고의 세월이다. ‘다 내 탓이다’ 하며 주도적인 문제해결 의지를 가진다면 인간이 만든 문제는 세상만사 다 해법이 있지 않겠는가.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했다. 고정관념에서 과감하게 탈피하고 길들여진 관성을 거부해야 비로소 신선한 세상에 도달할 수 있다. 새로운 생각이 현실을 다스리고 매너리즘에 빠진 의식구조를 개선한다. 관념에 머무르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건강한 사회에는 ‘진부함’을 깨뜨리는 ‘지적 긴장’이 존재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경쟁이 부끄러운 역사를 쓰는 것보다 낫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끊임없이 담론을 공급하고 거짓 혹은 선과 악에 대한 신선한 지적 질문을 던지면서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인의 역할이다. 하지만 진짜 지식인은 진실을 보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중심에 건강한 청년이 있길 바란다. 그는 자기성장을 위해 고뇌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다. 현상은 복잡하지만 본질은 단순하다. 그러나 본질은 아무에게나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매사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나를 다독이며 다양한 체험이 축적된 통찰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라.

20세기 후반 클래식 음악계를 이끈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고 말이다.

연습이라는 노력의 중요성을 일갈하고 있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중국의 왕희지도 서예를 연마하기 위해 연못물이 까매지도록 먹을 갈았다고 한다. 인생길에서 맞닥뜨리는 사소한 문제에 대한 해법도 그렇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나누어 관점의 깊이를 다양하게 갖고 풀어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분석적인 사고다. 이렇게 단련된 지식인이 다변화 사회에서 필요하다. 그는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평범’에서 ‘비범’으로 나아갈 인물일 테고, ‘그가 걷는 길은 평범했지만 그 길 위에 선 그는 비범했다’라고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청년의 시기에 중요한 것은 이유 없는 슬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에 묻혀 감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단단해져야 한다. 그리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 침묵과 사색을 통해 나 자신을 관찰하고 바로잡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게 청년답게 사는 길이다. 절대로 우연이나 행운에 기대를 걸지 말라. 준비된 사람에게만 기회는 찾아온다.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 이전에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다스리는 데 주력하라”는 데카르트의 말에 새삼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한학수<청운대 방송영상학과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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