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덕숭산(德崇山) ‘수덕사 대웅전(修德寺 大雄殿)’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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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덕숭산(德崇山) ‘수덕사 대웅전(修德寺 大雄殿)’의 미학
  • 취재·사진=한관우·한기원·김경미·최진솔 기자, 협조=홍주일보·홍주신문 마을기자단·수덕사
  • 승인 2023.06.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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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신도시 주변마을 문화유산 〈1〉
수덕사 전경.
수덕사 전경.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가 자리하고 있다. 수덕사에는 우리나라 불교계 4대 총림중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남맥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 495m)의 품 안에 자리한 수덕사는 동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중심부에 우뚝 서 있다.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면서 낮은 구릉과 평탄한 들녘이 서로 이어지며 계곡의 골마다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이곳은 예로부터 ‘충남의 소금강’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곳 수덕사는 불조의 선맥(禪脈)이 면면히 계승되면서 많은 고승(高僧)과 석덕(碩德)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로 자리하고 있다.

백제 시대 사찰인 수덕사(修德寺)는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지만 학계에서는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 무왕 때(600~641년) 혜현 법사가 강론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 고종 2년(1865년)에 만공 선사가 중창해 우리나라 선종의 수도장으로 유명하다.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 시대 창건설을 방증하고 있다.
 

■ 국보 제49호 수덕사 대웅전(大雄殿)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수덕사 대웅전은 1937년 수리하면서 대들보에 ‘지대원년(至大元年)’이란 글씨가 발견돼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어졌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수덕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의 목조 단층건물로 배흘림기둥에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만들어진 주심포를 얹고 세 쪽 빗살 분합문을 단 소박한 전각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건축 시기가 명확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며, 한반도 목조 건축물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로 꼽힌다. 

대웅전을 앞마당 아래쪽에서 정면으로 올려다보면 지붕골이 아주 길고 높아서 지붕의 하중이 대단히 위압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외형은 특별하기보다는 단순한 편이지만 크게 눈에 띄는 별다른 장식은 없이 단정하고 정숙해 보여 고려 시대 목조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는 선종(禪宗)의 근본 도량이다. 수덕사 대웅전 앞에 서면 어떤 설명이 필요 없다. 가장 단순한 기와집 한 채가 우뚝 서 있는 형국이다. 선(禪)의 사찰 수덕사에 걸맞게 침묵하면서도 심오한 깊이를 전해주는 듯하다. 이것이 대웅전의 진정한 미학이다. 수덕사 대웅전의 맞배지붕은 불필요한 것,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다 덜어냈다. 쓸데없는 욕망과 번잡함을 털어내고 최후의 뼈대만을 건축으로 구현한 목조건축의 백미다. 수덕사 대웅전 앞에는 충청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3호인 수덕사 3층 석탑이 서 있다. 

수덕사는 완만한 덕숭산의 구릉을 따라 삼단과 석축을 쌓고 가장 위쪽에 대웅전을 배치한 전형적인 산지형 가람이다. ‘德崇山 修德寺(덕숭산 수덕사)’와 ‘東方第一禪院(동방제일선원)’이라 적힌 편액이 붙은 일주문을 통과한다. 좌측으로 수덕사 7층 석탑이 서 있는데, 1931년 만공 대선사(滿空 大禪師)가 건립한 석탑으로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돼 있다. ‘禪之宗刹修德寺(선지종찰수덕사)’와 ‘德崇叢林(덕숭총림)’이라는 편액이 붙은 황하정루(黃河精樓)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大雄殿)의 웅장한 모습이 눈으로 들어온다. 대웅전에는 석가, 아미타, 약사의 삼존불을 모시고 있고, 국내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 중 확실한 건립 연대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서 있으며, 왼쪽에는 범종각(梵鐘閣), 오른쪽에는 법고각(法鼓閣)이 세워져 있다.

덕숭산 정상 부근에 있는 능인선원은 100여 년 전 만공 선사가 금선대라는 초가를 지은 게 시초가 됐다고 전한다. 능인선원은 근대 선의 등불을 밝힌 ‘한국불교의 태산’ 경허·만공 선사와 선농일여(仙農一如)를 실천한 벽초의 선맥을 잇는 ‘선지종찰’의 대표적인 선원이다.

수덕사에는 세계일화를 바탕으로 해 민족정신 문화의 모음처라는 의미의 ‘근역성보관’이 있다. 이곳에는 불교 정보를 수집·조사·보존·전시함으로써 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의 축척과 더불어 불교문화의 이해와 가치 재인식의 장을 마련하고 있으며 본·말사 내 백제 시제부터 시작된 이 지역 불교의 원류와 시대에 따른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불교 문화재 600여 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 수덕사(修德寺)는 ‘3덕(德)’이 모인 곳
수덕사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몇 개 있다. 우선, 일주문에 붙어 있는 ‘덕숭산 수덕사(德崇山 修德寺)’라는 현판이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소전 손재형이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를 1944년 일본에서 찾아온 사람이 바로 소전 손재형이다. 손재형은 1920년대 초 추사의 글씨 ‘竹爐之室(죽로지실)’을 당시 집 한 채 값에 육박하는 1000원에 사들였다.

수덕사 일주문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오래된 여관이 하나 나온다. 수덕여관이다. 화가 이응노가 매입해 작품 활동을 하면서 문자 추상을 남긴 곳이다. 또한 나혜석의 상흔, 일엽 스님과 나혜석의 교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나혜석과 일엽 스님은 일제강점기 남녀평등과 자유연애의 기치를 내세우며 한 시대를 풍미한 신여성의 선두주자였다. 하지만 한 사람은 가부장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고 한 사람은 세속의 영욕을 모두 버리고 불가에 귀의했다. 일엽 스님(김주원)은 1933년 출가했고, 나혜석은 1937년 일엽에 의지해 지친 삶을 보듬고자 수덕사를 찾았으나 출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나혜석은 1940년대 초까지 수덕여관에 머물렀지만 끝내 그곳을 떠나야 했고, 1948년 행려병자로 길에 쓰러져 고단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래서일까. 수덕사에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시보다 더 시 같은 삶의 애환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수덕사에서 수행하던 비구니 일엽(一葉) 스님은 1962년 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를 펴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가수 송춘희는 1966년 ‘수덕사의 여승’이란 가요를 발표해 대박을 터뜨렸다. 이러한 사연 속에서도 예산 수덕사(修德寺)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국보 제49호 대웅전(大雄殿)이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고 가장 아름다운 전통 건축의 하나로 꼽힌다. 

수덕사 대웅전의 맞배지붕 매력과 미학은 최소한의 지붕선만 있을 뿐 거기에 어떠한 장식이나 꾸밈도 없기 때문이다. 핵심공간으로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는 수덕사 대웅전은 동선의 배치와 뛰어난 구조미, 단순한 듯 보이지만 절묘한 기하학적 구성이 오히려 더 힘이 넘치는 맞배지붕의 매력인지도 모를 일이다. 

수덕사(修德寺)는 ‘3덕(德)’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산 이름 ‘덕숭’(德崇)과 절 이름 ‘수덕’(修德), 마을 이름 ‘덕산’(德山)에 ‘덕(德)’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德)을 숭상한다’는 산의 의미와 ‘덕(德)을 닦는다’는 절의 의미, ‘덕(德)이 있는 마을’의 의미가 저절로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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