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 한원진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 서부면 ‘양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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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한원진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 서부면 ‘양곡사’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6.2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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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46〉

양곡사(暘谷祠)는 홍성군 서부면 홍남서로 131-31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 유학자로 숙종 8년(1682년)에 출생해 영조 27년(1751년)에 생을 마친 한원진(韓元震)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祠堂)으로 호는 남당(南塘)이며, 자는 덕소(德沼)로 관직은 장령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다.

남당 한원진은 1682년 서울 어의동에서 태어나 8세 때 그의 할아버지 현감공을 따라 당시 홍주의 서부 남당리에 내려온 이래 줄곧 홍주(洪州)에서 한평생을 보낸 홍주의 위인이다. 남당 한원진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경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유기이며, 어머니는 함양 박씨로 숭부의 딸이다. 

남당 한원진은 조선조 후기 대학자로서 공자와 맹자, 주자를 도학의 정통으로 삼고 율곡 이이로부터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해 기호유학을 집대성했다. 문집으로 ‘남당집’ 38권이 있으며, 특히 ‘주자언론동이고’는 송시열이 착수하고 권상하를 거쳐 한원진에 의해 50여 년 만에 완성된 한국 성리학의 거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지역에서는 남당 한원진의 위상과 업적에 대해 사실 잘 모르는 실정이다.

면천복씨 ‘어사재유록’에 의하면 1772년 8월 19일 이유락, 김두순 등 유생들이 남당의 21주기에 기금모금을 모아 1773년(영조 49)에 건립한 사우이다. 송시열의 수재자이며 기호학파 지도자인 권상하의 뛰어난 제자들이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성만징)’의 제1인자였을 뿐만아니라 기호학파가 양분되자 한원진이 살던 호서지방 학자들이 지지해 호론(湖論)의 영수(領袖)가 됐다. 한원진은 이이(이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고수했다. 남당 한원진은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 재치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리학설에 정통했다.

이밖에도 율려·천문·지리·병가·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했다. 또 남당 한원진은 평생 학문의 목표를 수사문설에 두고 스승의 학설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이나 비판의 여지 없이 절대 정당한 것으로 따랐다. 실제로 한원진은 송시열의 학문과 실천을 계승하기 위해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문제를 집중 연구했다.

이와 기(氣)의 부잡불리(不雜不離), 무선후성(無先後性)과 이에 입각한 인과 물의 차별상을 의리론(義理論)의 범주에서 해석함으로써 ‘주자-장재-서경덕-이율곡-김장생-송시열-권상하-강문팔학사’로 이어지는 ‘도통연원(道統淵源)’의 체계를 확정지으려 했다. 기호학파 권상화의 학통을 이어 정통 주자학을 충실히 계승·발전시켰으며, 호락논쟁에서 호론(湖論)을 이끌어 이후 ‘위정척사운동’에 영향을 준 인물로 홍주(洪州, 홍성)가 낳은 대표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이후 홍주의병을 비롯한 항일의병운동의 사상적 근간이 됐다.

특히 한원진의 사상은 한말 홍주의병장인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해 항일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만해 한용운 선사와 백야 김좌진 장군 등 홍주 출신의 수많은 충절위인들의 정신적 배경이 되면서 홍주(홍성) 지역의 사상적 뿌리를 형성했다.

남당 한원진은 1751에 세상을 떠났으며, 홍성군 서부면 양곡리 174에 안장됐다. 한원진의 제향이 거행되고 있는 ‘양곡사(暘谷祠)’는 남당 한원진을 기리는 사당으로 1773년에 창건돼 1991년 3월 5일 홍성군 지정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됐다. 본래 1772년(영조 48)에 호서지방의 유생들이 ‘양곡영건소’를 세우기로 하고, 1773년 건립, 훼철됐다가 1844년(헌종 9) 양곡리 쇠멀티에 다시 건립됐고,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됐다. 이후 200여 년이 지난 1985~1987년에 양곡정사가 있던 자리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31㎡의 규모로 신축하고, 1988년 3월 27일에 영정을 모시는 의식을 거행했다. 양곡사에는 청주인 문순공 남당 한원진(文純公 南塘 韓元震, 1682~1751) 이외에도 은진인 운평 송능상(雲坪 宋能相, 1710~1758)과 경주인 한간 김한록(寒澗 金漢祿, 1722~1790)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라에 공덕이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 찬양하며 높이는 것이 바로 시호(諡號)다. 나라에서 주는 호(號)인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이다. 송시열~권상하를 잇는 기호유학의 거두인 한원진도 업적을 인정받아 시호를 받는다. 한원진 사후인 정조년간 1799년에 선비들이 시호를 받을 수 있도록 정2품 이조판서로 증직시켜달라고 상소했고, 정조도 이를 윤허했다. 이후 1802년(嘉慶 7) 7월 26일에 한원진(韓元震)은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그래서 남당이라는 호 대신 ‘문순공 한원진’이라고 불러도 맞다. 시호를 문순이라고 내린 이유를 ‘한원진증시교지(韓元震贈諡敎旨)’의 맨 왼쪽 옆에 적었는데 ‘도와 덕이 있고 널리 들어 많이 알아서 문(文)이라 했고, 정직하고 정순해 순(純)이라 했다’는 뜻이다. 시호교지라 붉은색으로 물들인 종이를 사용하며 시호를 받기 위해서 시호를 받는 집에서 가장 좋은 종이를 마련하기 때문에 다른 교지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종이의 질에 차이가 난다.

지난 2012년 10월 19일 홍성에 위치하고 있는 청운대학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남당학연구소’를 개설,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남당 한원진의 정신문화 자원은 지역과 국가의 자랑이며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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