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 ‘추성창의기념관’ 전국 최초 연합의병 거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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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 ‘추성창의기념관’ 전국 최초 연합의병 거병지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08.2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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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4〉
대나무의 고장 전남 담양의 죽녹원 내에 지난 2012년 7월 담양의 6000여 의병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추성창의기념관 전경.
대나무의 고장 전남 담양의 죽녹원 내에 지난 2012년 7월 담양의 6000여 의병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추성창의기념관 전경.

호남 의병항쟁 촉발 시킨 의병장 고경명, 6000명의 의병 궐기
담양, 전국 최초의 항일 연합의병 궐기지, 의병 창의의 시발점
전라의병 진동장군 유팽로, 최초 의병장 곽재우보다 이틀 빨라
의병장 김덕령, 충청도 홍주 이몽학난 진압하려다 무고로 죽어

 

의병은 자발적으로 봉기한 군사들로서 전직관료, 유생, 일반 백성, 노비, 승려까지 의병에 참여하면서 조선 최대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규군인 관군이 붕괴되면서 백성들 스스로가 자기 고장을 지키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 일어난 것이 의병이다. 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몇십 명에서 많게는 몇천 명의 규모로 이뤄졌다. 이들은 개인의 재산을 사용해 물자를 조달했으며, 부대마다 지켜야 할 군율을 두기도 했다.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의병은 적을 기습하는 유격전 전법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의병 활동의 원천은 무기나 병력 등의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충성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결사 항쟁의 정신이었다.

일본군은 주로 주요 도로를 따라 진격하고, 요충지에만 군대를 배치했기 때문에 의병들은 후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일본군을 괴롭혔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관군의 무력으로 인해 일본군이 수십일 사이에 우리의 국토와 죄 없는 백성들을 짓밟자, 동족을 구하고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추성창의기념관 입구에 전시된 담양의병궐기도.
추성창의기념관 입구에 전시된 담양의병궐기도.

■ 전국 최초 연합의병의 거병지
전남 담양의 ‘추성창의기념관’은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 연합의병의 거병지다. ‘추성창의기념관’은 호국영령을 기리는 뜻깊은 건축물로 담양 죽녹원 후문에 위치하고 있다. 담양군에서는 지난 2012년 7월 11일 의병들의 순국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적 현장을 복원해 기념하고 있다.

호남 의병의 항쟁을 촉발 시킨 사람은 바로 의병장 고경명으로, 담양 ‘추성관’에서 유팽로, 양대박, 안영 등을 비롯해 6000여 명의 의병과 함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던 전국 최초의 항일 연합의병의 궐기지이다. 담양은 전국 최초의 거도적인 항일 연합의병의 궐기지로 임진왜란 당시 대규모 의병 창의의 시발점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중심에 있었다. 담양군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들의 순국정신을 기리고 의병정신을 계승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조국 사랑의 고향이라는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후손들에게는 지역 사랑의 덕목을 함양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할용하고자 당시의 역사적 현장을 복원해 기념하게 됐다.

 

담양군 유물 수집 운동을 통해 기증된 유물들이 전지 중이다.
담양군 유물 수집 운동을 통해 기증된 유물들이 전지 중이다.

지난 2012년 7월 11일 임란시 담양회맹군이 추성관에서 출발해 구국을 위한 근왕길에 올랐던 날을 기념해 ‘추성창의기념관’ 개관식을 개최했다. ‘담양추성창의기념관’은 지난 2009년에 착공해 군비 24억 6700만 원과 국비 12억 8600만원 등 총 37억 5300만원의 사업비를 투입, 죽녹원과 죽향문화체험마을 인근 9900여㎡의 부지에 추성관과 제봉관(전시실), 월파관(강당), 동재와 서재 그리고 관리사 등을 갖췄다. 한편, 전시실 (제봉관)은 제봉문집 등 유물 26점을 갖추고 있으며, 담양군의 유물 수집 운동으로 청계 안영의 종손이 교지를 비롯해 사제실기 등과 함께 학산사 보존회에서 유물 등이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담양을 ‘의향(義鄕)’의 고장이라 일컫는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고경명’이 의병을 모집하자 창평 처가에  살고 있던 둘째 아들 고인후가 담양에서 의병을 많이 모집해 지금의 담양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의병대를 조직하고 훈련 시키는 등 이곳 담양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198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고인후’의 11대 손 ‘고광순’이 좌도의병장이 돼 많은 의병들을 이끌고 전라남북도 일대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지리산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고인후의 기념관은 담양 인근 창평에 있다.

 

추성창의기념관에 걸려 있는 의병장 고경명 등 담양의 항일의병장들.
추성창의기념관에 걸려 있는 의병장 고경명 등 담양의 항일의병장들.

■ 의병의 숫자 6000명, 대규모 연합군
‘전라도의병 진동장군(鎭東將軍) 유팽로’라고 쓴 대청기를 높이 든 군사는 임진왜란의 첫 의병이었다. 최초 의병장으로 알려진 홍의장군 곽재우보다도 이틀 빨랐다. 유팽로는 의병을 동악산 청계동에서 훈련 시켰다. 이종사촌 형인 남원의 양대박도 이때 합류했다. 유팽로는 전라도의 다른 의병장들과 힘을 합쳐 담양 추성관에서 ‘호남연합의병’을 출범시켰다. 의병의 숫자가 6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연합군이었는데, 총대장에 고경명을 추대하고 유팽로는 좌부장, 양대박이 우부장을 맡았다. 이름하여 ‘담양회맹군’이다. 6월 11일 담양을 출발한 호남연합의병은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기며 북쪽으로 달렸다. 곡창지대를 염두에 두고 전주 침공을 준비하던 고바야카와군 본진을 금산성에서 맞닥뜨렸는데, 이것이 제1차 금산전투다. 이 싸움에서 유팽로는 고경명 등과 함께 순절했다.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유팽로는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호남 3창의’로 불린다.

금산전투에서 호남의병은 큰 희생을 치렀다. ‘조선왕조실록(선조 수정실록)’은 유팽로와 고경명의 최후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종사관 유팽로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대장은 모면하였는가?’ 물었고, ‘아직 못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급히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들어갔다. (…중략…) 고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고 하였다. 유팽로는 ‘어떻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라며 안영과 고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중에서 함께 전사하고….”

금산전투를 분기점으로 호남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호남을 차지하려는 일본군의 계획도 무산됐다. 호남의병의 창의와 희생은 임진왜란의 흐름까지 한순간에 바꿔놓았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마음 놓고 싸워 이길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 선봉에 유팽로가 있었다.

특히 담양의 중심가에 있는 담양동초등학교는 옛 현청 자리로 1592년 고경명 장군이 담양에서 의병 6000여 명을 규합해 왜군에 맞서 창의했던 뜻깊은 장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응회(金應會) 의병장은 처남 김덕령(金德齡) 장군과 함께 담양 객사(추성관)에서 담양 회맹군 창의(倡義)에 참여했다. 창의란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날 추성관에 모인 의병 6000여 명은 고경명 장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호남 의병장 김덕령은 억울하게 죽었다. 20대 혈기 방장한 김덕령은 김천일과 최경회의 의병군이 전멸한 뒤 담양에서 의병을 조직했다. 서인(西人)인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던 김덕령은 1596년(선조 29) 7월 6일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키자 진압하러 가다가 난이 평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그 일로 반란수괴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誣告)로 끝내 죽어야 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柳成龍)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尹根壽)의 형이기도 했던 서인인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는 엄벌을 주장했다. 김덕령은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아 결국 장독(杖毒)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향년 30세였다.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곡(春山曲)’이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답답하고 억울 심정을 토해냈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의 죽음으로 의병(義兵)에 나서면 집안이 망한다는 인식이 퍼졌고 이로 인해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의 씨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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