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향교·수덕사, 가야산·가야사터·가야9곡 품은 ‘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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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향교·수덕사, 가야산·가야사터·가야9곡 품은 ‘덕산’
  • 취재·사진=한관우·한기원·김경미·최진솔 기자, 협조=홍주일보·홍주신문 마을기자단
  • 승인 2023.09.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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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신도시 주변마을 문화유산 〈7〉
덕산향교 전경. 왼쪽이 동재와 대성전, 오른쪽 건물이 서재다.
덕산향교 전경. 왼쪽이 동재와 대성전, 오른쪽 건물이 서재다.
  • 덕산향교(德山鄕校) 충청남도기념물 제137호

예산군 덕산면 덕산향교길 88-34(사동리)의 2110㎡ 면적에 위치하고 있는 ‘덕산향교(德山鄕校, 충청남도 기념물 제137호)’는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 1430년(세종 12) 1월 21일 기사에 이조에서 아뢰기를 “500호(戶) 이상 되는 각 고을에는 으레히 교도(敎導)훈도(訓導)를 두었사온데, 영산현(靈山縣)은 506호이고, 언양현(彦陽縣)은 680호이고, 울진현(蔚珍縣)은 502호이고, 덕산현(德山縣)은 658호이오니, 위에 말씀드린 각 고을에는 모두 교도(敎導)를 두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 있다.

교도는 조선 시대, 지방 군현(郡縣)의 향교(鄕校)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던 벼슬로 세종시대인 조선 전기에 향교가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 덕산현 학교조에 따르면 “향교가 현에서 서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在縣西五里)”라고 기록했다. 기록에 나오는 위치와 현재의 향교 위치가 일치해 ‘덕산향교(德山鄕校)’는 건립 이후 한 번도 옮긴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 시기가 1530년(중종 25)이므로  조선 전기에 창건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국여지지’ 제3권 충청도 우도(右道) 홍주진(洪州鎭) 덕산현(德山縣) 학교조(學校條)에도 ‘향교(鄕校) 현(縣) 서(西)쪽 5리(五里)에 있다’고 했다.

덕산향교(德山鄕校) 관련 기록으로는 ‘학교등록(學校謄錄)’ 1662년(현종 3) 3월 20일 조 “덕산향교 개수(改修) 당시 향교 근처에 전염병이 돌아 향교 제례가 어려우니 부득이 잠시 동안 봉안을 쉬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향교 건물의 구체적인 중수와 관련한 기록은 1682년(숙종 8)의 대성전 중건상량문이 최초이며, 1700~1800년대 중수 기록은 자료로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게판(揭板)으로 중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97년(광무 1) 조종서(趙鍾緖)가 군수로 부임해 자신의 봉급으로 담을 개축하기도 했다. 1905년 동재(東齋)의 중수를 비롯해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현대에 들어서는 1987년에 보수했다. 대성전은 숙종 8년(1682)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87년에 다시 한번 보수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덕산향교 대성전 현판.
덕산향교 대성전 현판.

■ 덕산향교에는 외삼문(外三門)이 없다
덕산향교(德山鄕校·典校 정세호)는 1413년(태종 13)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복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1997년에 충청남도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됐다. 덕산향교(德山鄕校)의 건물 배치는 외삼문 없이 앞쪽에 바로 교육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 교육(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제사공간인 내삼문(內三門)·수복가(守僕家) 등이 있다. 하지만 덕산향교에는 외삼문(外三門)이 없다.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7칸, 측면 1칸 형태로 가운데 3칸은 마루이고, 동쪽 1칸은 중문이며, 서쪽 2칸 중 1칸은 온돌방, 가장 서측은 다락을 만든 형태이다. 다락의 하부는 부엌을 만들어 쓰고, 다락은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명륜당은 동재와 ‘ㄱ자’로 연결돼 있다. 명륜당과 연결된 중문에는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다. 명륜당의 동쪽으로 ‘ㄱ자’로 동재가 연결돼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1칸 반 형태이다. 남쪽으로부터 부엌 칸과 온돌방 2개, 그리고 1칸 규모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가운데 3칸의 전면에는 반 칸 열을 툇마루로 꾸몄다.

대성전(大成殿)에는 5성(五聖), 송조 2현(宋朝 二賢),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은 앞면 7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교관이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기능을 주로 담당했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20명, 관리인 1명이 향교를 관리하고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옛 덕산군 지도.
옛 덕산군 지도.

■ 옛 덕산군지도와 ‘가야 9곡 녹색길’
조선 시대 덕산군은 현재의 충청남도 예산군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덕산면, 삽교읍, 봉산면, 고덕면 일대를 관할했다. 현재의 예산군은 조선 시대 예산, 덕산, 대흥이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시에 합쳐진 것이다. ‘덕산(德山)’은 조선 태종 5년(1405)에 기존의 덕풍현(德豊縣)과 이산현(伊山縣)을 합쳐서 만든 지명이다.

옛 덕산군지도를 보면 지도 오른쪽에 그려진 하천을 삽교천이라 부른다. 하천 위에 삽교(揷橋)를 그려 놓았다. 

지도 가운데에 관아들이 그려진 읍치(邑治)는 덕산면 읍내리 일대이며, 덕산초등학교 주변에 관아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남쪽에 다섯 갈래로 나누어진 길이 그려져 있다. 덕산초등학교에서 덕산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다 보면 지금도 이 길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왼쪽 아래에 그려진 향교(鄕校)는 덕산면 사동리에 지금도 있다. 읍치 서쪽에는 가야산(伽倻山)이 그려져 있고, 그 맥이 이어진 곳에 남연군묘(南延君墓)가 보인다. 

명당처럼 산줄기를 그려 놓았다. 가야산은 지금도 가야산으로 부르는데, 이곳에 있던 사찰이 가야사(伽倻寺)였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를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자리로 썼다. 그래서 이전 지도에는 남연군묘 위치에 가야사가 그려져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관광지로 유명한 ‘수덕사(修德寺)’가 그려져 있다. 지금은 ‘예산 수덕사’라고 부르고 있지만 조선 시대 행정구역으로는 ‘덕산 수덕사’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한편 예산군은 ‘가야 9곡 녹색길’을 조성했는데, 가야 9곡 녹색길은 가야 9곡이라는 역사문화자원을 녹색길의 스토리텔링 주제로 활용, 덕산온천지구에서 옥계·상가저수지 일원에 녹색길 16km(기존 13.2km, 신규 2.8km)와 휴게·전망시설, 안내시설, 환경시설 등 방문객 지원시설을 설치하는 등 마을 주민들이 활용했던 옛길을 복원하는 것이다.

가야 9곡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병계 윤봉구(1681∼1767)가 가야계곡의 아름다운 비경 아홉 곳을 ‘가야 9곡’이라 칭하고 그의 문집에 기록해 놓음으로써 유명해진 장소다. 

△1곡 관어대(옥계의 물이 한곳에 모이는 곳으로 넓은 개울이 형성돼 작은 배가 있었고 낚시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음) △2곡 옥병계(가얏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크게 휘돌아 소를 이룰 곳으로 큰 절벽이 있으며 그 위에 강당이 있었다고 함. 덕산현의 관기가 바위 위 강당에서 놀다 실수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어 기암으로도 불림) △3곡 습운천(가얏골 물에 쓸려온 토사가 쌓이고 중선동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해지는 곳으로 습지처럼 형성이 되어 늘 신비로운 구름이 덮여 있었다고 함) △4곡 석문담(수량이 풍부한 작은 폭포가 있는데 양쪽에 대문 기둥처럼 바위가 솟아 있어 석문담이라 부르며 우암 송시열은 ‘취석’을 죽천 김진규는 ‘석문담’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남겼다고 함) △5곡 영화담(복숭아나무가 많아 꽃이 피면 물속에 꽃이 비춰지고 꽃잎이 떨어져 경치가 아주 좋았다고 함) △6곡 탁석천(조선 시대에는 스님들도 국가의 노역을 담당했는데 가야사 스님들은 종이를 만들었다고 함. 닥나무를 물에 불리고 껍질을 벗겨 찧었다고 하며 넓은 소를 이루고 있어 멱감는 곳으로 유명함) △7곡 와룡담(덕산현감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 곳으로 죽천 김진규는 이곳 바위에 와룡담이라 새겼고, 그 옆에는 깊은 자연동굴이 있어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음) △8곡 고운벽(수렴동 계곡에 큰 바위가 서있는데 서령태수로 왔던 최치원이 쉬어갔다는 전설이 있어 그의 호를 따 고운벽이라 함) △9곡 옥량폭(석문봉과 옥양봉 사이의 계곡에 두 개의 크고 긴 바위가 있어 이곳으로 계곡물이 흘러 폭포를 이루는데, 이 근처엔 백목련이 자생해 봄철 신비로운 장관을 연출했다고 함)을 말한다.

또한 ‘가야 9곡 녹색길’ 조성지 주변에는 남연군묘, 덕산향교, 헌종태실, 아랫산소, 장수발자국전설지, 광덕사, 보덕사, 한자학당 등의 역사문화자원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가야산, 반딧불이가 서식할 정도로 생태계가 잘 보전돼 있는 옥계저수지, 상가저수지 등이 위치하고 있어 예산군의 또 다른 관광명소로 꼽히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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